이혼과 재혼과 연애가 배경이었지만 배경은 배경일 뿐
처음엔 아빠랑 살다가 나중엔 엄마랑 살게 되었다. 계속 살던 종로를 떠나서 장충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땐 몰랐지만 아마 엄마 아빠의 이혼이 이사의 이유지 않았을까 싶다. 새 동네는 단정한 주택가였고
우리 집이 있는 빌라는 입구에 정원이 예쁘게 꾸며진 곳이었다. 항상 또래 보다 머리 하나가 크던 나는
나만 '친구들과 다른 동네'로 이사 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 변화는 설레는 일이니까.
학창 시절 내내, 낯선 곳에서 오는 전학생들이 신기했다. 나에게도 ‘전학’의 로망이 있었지만 초등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전 기간 내내 단 한번도 전학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볼거리 놀거리들이 넘치는 도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렇게 버라이어티한 종로 너머의 세상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막연히 그 너머를 동경했다. 그래서 장충동이 좋았다. 장충단공원도 좋았고 태극당 빵집도 좋았다. 다만 중학교가 있던 안국동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동대입구역에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대로변에 줄지어 있던
족발집들에서 나는 꼬릿한 냄새는 10대 소녀였던 나에게는 비호감이었다.
그땐 족발의 미미를 미처 모르던 시절이었다.
걸어 다니는 친구들에 비해 지하철을 타고 등하교하는 느낌이 왠지 어른이 된 것 같고 나쁘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안국역 가까이 있는 덕성여자중학교였다. 근처에는 덕성여고, 그리고 풍문여중, 여고가 있었다. 지금도 벚꽃 명소, 데이트 장소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정독도서관도 바로 덕성여중 위였다. 중학생이 되고는 그렇게 학교들이 모여 있는 '안국동' '송현동' '소격동'이 나의 원더랜드였다. 나는 덕성여중에 다녔지만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풍문여중에 다녔기 때문에 풍문도 마치 내 학교 드나들듯 다녔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지만 정독도서관을 좋아했다. 방학 때 정독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다가 도서관 매점에서 라면을 사 먹거나 시험기간 주말이 오면 친구들과 정독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기 전 책상 정리 한 20분 하고 공부 한 30분 하고 매점에 가서 주전부리를 사 먹다가 아름다운 정독도서관 벤치에 앉아 수다 떨다가 애써 정리해 둔 책상 위 책이랑 필기구를 챙겨 저녁 먹기 전에 집으로 가곤 했다. 뿐 아니라 한 번은 덕성여중 대표로 여러 학교 애들이 모여 책 보고 독후감을 쓰는 독서대회에 나가기도 했는데 그 장소도 정독도서관이었다. 그렇게 정독부터 풍문까지 이어지는 그 거리들은 소녀라고 불릴 수 있는 시절, 나의 사춘기 추억이 그야말로 덕지덕지하다. 이 글을 쓰면서 추억을 건들고 끄집어내다 보니까 정독도서관이나 학교들의,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코 끝에 와닿는다.
그 당시엔 도심 중에서도 도심, 그리고 주변엔 남중 남고도 많이 있어서 공부보다는 힙한 애들이 많은 걸로
유명한 ‘힙’ 학군이었다. 아마 엄마는 그걸 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곧잘 했으니까. 예일여고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공부 빡세게 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엄마는 예일여고를 타깃으로 내 주소를 친척분의 주소로 바꿨지만 내 운명은 산속의 해맑고 자유로운 영혼들이 다니던 '상명여자대학교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였던 것이다. 이사를 가고 친구들 아무도 없는 완전 타지의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낯선 변화들이 넘쳐났던 시기였다. 상명사대부고 친구들을 해맑다고 이야기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덕성여중, 풍문여중 시절에 반 학생들 중 한 두 명씩은 꼭 날라리가 있었다. (요새는 날라리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날라리라고 하면 일본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눈썹을 가늘게 밀고 맥주로 한 것 같은 얼룩덜룩한 염색이 표식이었다. 그래도 선입견 없이 이야기를 나누면 다 같은 아이들이긴 했다. 그렇지만 상명에 오고는 곧 없어질 것처럼 가늘게 정리해 놓은 눈썹도 얼룩덜룩 염색머리도 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날라리' 표식을 한 아이는 없었다는 것이다. 산 꼭대기를 힘겹게 오르내리다 보면 사람이 더 선해지는 건가, 암튼 고등학교 때 징글징글하던 경사진 산이 지금은 나의 최고의 힐링 장소인 것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평화롭던 상명의 기억 때문인가 보다.
그렇지만 난 그게 싫지는 않았다. 처음 가보는 동네, 친구 하나 없는 심지어 중학교도 아닌 고등학교!
전학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내게는 마치 전학이라도 가는 듯, 입학식에 혼자 가는 발걸음이 두근거렸다. 아무도 모르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서 낯선 사람이 되어본다는 설렘은
상명사대부고 그 모진 경사를 접하고는 바로 짜증으로 바뀌었다.
지독한 경사로 지금도 유명한 상명은 등교길이 설사 등산로라고 쳐도 경사가 극악 맞았다.
그중에서도 고등학교가 가장 꼭대기에 있었다. 그 경사가 얼마나 끔찍하냐면 딸을 등교시키던 한 어머니가
경사에서 브레이크가 밀려 사고로 모녀가 즉사했다는 괴담이 있을 정도였다. 길이 잘 닦이기 전까지는
눈이 많이 온 날에는 학교에서 산 입구까지 밧줄을 내리면 학생들이 마치 암벽등반이라도 하듯이 그 밧줄을 잡고 학교로 등반해야 했던 시절의 무용담도 있었다.
경사를 헥헥대고 올라가면서 내 종아리는 얼마나 두꺼워질 것인가 절망하고 짜증 났던 마음은 ‘연극반모집’이라는 포스터 하나로 다 사라졌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난히 키가 크고 어른 얼굴을 갖고 있던 중학교 시절, 동네 사방이 문화가 넘쳐나는 곳이라 자연스레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조숙한 외모 덕택에 혼자 극장에 다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방학 때 혼자, 자주 극장에 갔다. 그땐 멀티플렉스가 아직 없을 때였는데
작은 소극장에서 예술 영화도 많이 상영했었다. 종로 2가에 있던 코아아트홀, 피카디리 옆에 있던 피카소극장에서는 여름 방학 기간엔 조조 상영을 1시간 일찍 시작했다. 대학생 관객들의 방학을 노린 것였는지 모르겠지만 대학생 체구의 중학생이던 내가 톡톡히 이용했다. 일어나자마자 극장으로 가서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조용한 극장 안에 혼자 앉아 있으면 영화 시작 전까지 듣기 좋은 팝송을 틀어줬었다. 음질은 또 어찌나 좋던지. 거기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보면 서너 명쯤 더 관객이 차고 불이 꺼진다. 숨 막히는 순간, 이윽고 커다란 스크린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난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로 떨어진 앨리스처럼 스크린 속 저 너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인공 뒤 어디에서 숨어보면서 그들의 호흡도 함께 느꼈다. 당연히 난 연극반에 들어갔다. 극장을 하도 다니다 못해 연극도 보러 다녔는데 그렇게 동경하던 연극을 실제로 내가 할 수도 있다? 연극반은 거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나에게야 세상 어른이지만 결혼을 일찍 하던 시절의 두 사람은 그때 나이가 40대 초반, 30대 후반 정도였을 테니 지금 세상으로 보면 얼마나 젊은 때인가 싶다. 엄마의 인생, 아빠의 인생이 행복해야지, 나나 오빠의 눈치를 보면서 불행하게 함께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도 불행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난 괜찮았다. 게다가 양갈래머리를 따고 사복을 입고 다니던 중학생에서 숏커트로 자르고 교복을 입고 다니는 고등학생으로, 모습만 바뀐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문화의 친구들, 또 다른 동네, 연극반 등 그야말로 변화가 넘쳐나던
그 시절 나 살기도 바빴다. 사람들은 부모의 이혼이 아이를 비뚤어지게 한다고도 하고 부모가 이혼하면
아이의 성적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적이 안 떨어진 게 아니고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해서 내가 공부할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닌데 왜 성적이 떨어지는 건지 그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의 내가 섬세한 ‘뇌’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부모님의 이혼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노느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성적이 떨어졌을 뿐이라 생각했다.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망치고 물리랑 수학이 너무 어려워져서 또 망치고 하면서 공부는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기초가 탄탄했던 국어랑 영어 정도가 받쳐줘서 중간에 머무를 수 있는 정도였다.
입학식 무렵 20분도 넘게 걸리던 경사 초입부터 학교까지의 속도는 1학년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9분대까지 단축되었다. 예상대로 종아리는 점점 더 튼튼해지고 말이다. 하체가 인체의 산소통이라고 하던데 본의 아니게 내 몸에 산소를 잔뜩 비축하던 시절이었다. 장마가 오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체육복을 입고 비를 맞은 채 운동장이랑 교정을 뛰어다녔다. 조금 내려오면 그 당시 여대였던 상명사범대학교가 있었는데 친구들과 경사진 잔디밭 맨 위로 뛰어 올라가서 마치 넓은 미끄럼틀 타듯이 아래까지 데굴데굴 굴러내려 왔다. 비를 머금은 잔디는 푹신하고 촉촉했다. 후덥지근한 장마에 '잔디 구르기' 를 하면 그렇게 시원하고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경사가 없는 학교를 가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오르고 구르고 다시 오르고 구르고 했다. 옷도 얼굴도 머리도 잔디로 뒤범벅이 되어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땐 재미를 넘어서는 짜릿함이 있었다. 굴러 내려올 때 어쩌면 브금으로 I Believe I Can Fly 정도가 흘렀을지도.
처음 무대에 올랐던 고1 때, 남다른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설렘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사실 무대에 오르는 순간, 게다가 연기를 하는 그 순간은 지나고 보면 찰나에 가깝다.
하지만 매일 아침 복식호흡을 연습하러 원래 등교 시간보다 일찍 학교에 와서 뒤운동장에 모이고
여름 방학 내내 학교에 나와서 축제 때 올릴 연극 연습을 하던 그 시간들, 얼마 안 되는 대사지만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았던 대본은 바로 그 찰나를 위한 것이였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엔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묘한 긴장감 때문에 덜덜 떨렸다. 그것도 잠시,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에 오르니 이상하게 긴장이 사라졌다. 갑자기 샥! 무대도 구석구석 다 보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관객을 향해 대사를 칠 때 엄마랑 지금의 아버지가 함께 와서 무대에 앉아 나를 보던 모습이 선하다. 지금도 연극배우들이 무대 위에선 관객의 얼굴이 하나하나 다 보인다고 하던데 그때 신기할 정도로 엄마, 아버지가 보였다. 엄마의 행복을 바라긴 했지만 나도 그냥 딸내미라서 집에 놀러 오시던 엄마 남자친구(지금은 너무 사랑하는 아버지지만)가 불편하기만 했는데 그날 축제 때 내 첫 무대에는 엄마가 혼자 아니고 아버지랑 함께
웃으면서 나를 보던 장면이 참 좋았다. 혼자 있는 그림이었으면 왠지 지금까지 미소랑 함께 떠올리는 장면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이혼 재혼 재결합 연애들이 있었지만 나는 하체에 산소를 잔뜩 채우며 드라마틱한 경사를 오르기도 구르기도 하면서 어른으로 자라나 갔다. 그때 내게 채워진 것은 하체의 산소가 아니라 어쩌면 영혼의 산소였을지 모르는 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