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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aying CEO Aug 20. 2023

인생은 짧고, 내 여름은 길었다

빨래와 옥수수로 보낸 나의 여름

당신의 여름 나기는 어떠한가요?

팬데믹 (Pandemic)으로 바이러스와 사투하며 두문불출 방구석에서 긍긍거린, 두렵고 힘겹고 긴 나날들을 보냈지요.


올여름 많은 사람들이 지난 3년 동안 누리지 못한 생의 기쁨을 찾기 위한 보복여행을 만끽하러 먼 나라로 피서 여행을 떠났지요. 저 역시도 유행을 따라, 내가 좋아하는 유럽의 어느 나라 어느 도시로 가서 한 달 살이를 할지, 무엇을 먹고 마실지, 여행기사와 여행사의 안내자료들을 뒤지다가 여름 한 달을 그냥 보내고 말았지요. 결국 여행하는 여름이 아닌 여행을 가기 위한 여름을 보내 버린 셈이지요.


십여 년 전 북유럽 노르웨이와 핀란드의 백야를 찾아 간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백야의 해가 지지 않는 신비한 여름날 북극해 한가운데 현지 외국인 동료들과 낛시배를 띄워 놓고, 하얀 웃통 드러나게 셔츠를 벗어 제치며 해가 지지 않는 여름밤의 추억들이 퇴근길 생맥주 한 잔에  되살아 납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소주에 현지 맥주를 1:3으로 섞어 'Korean Soju Cocktail' (요즘은 'K-소맥'이라 한다지요)을 소개하며 글로벌 여러 나라에서 온 동료들과 밤이 새도록 부어라 마셔라 긴 여름밤을 보냈었지요. 가져간 짐 속에서 또 다른 비장의 무기 라면 수프로 끓인 물에 현지 소시지를 넣어 'K-해장국'으로 서양 친구들에게 소개했지요.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배운 숟가락을 음주가무 마이크로 사용하며, 젓가락으로 드럼 치는 현란한 테크닉을 선보일 때 환호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다이내믹 'K-Culture'가 곧 세상을 리드할 것을 이미 그때 간파 했지요. 제가 세상에 태어난 후 이모 할머님에게 처음 배운 18번 노래 이미자 선생님의 '동백아가씨'를 휘날레로 불러주며 'K-Trot'이 언젠가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예견했지요.


여름휴가철이 되면 생각나는 국위선양의 북유럽 백야의 밤들은 유럽의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전설이 되었고 늘 제 가슴을 들뜨게 하지요! 물론 당신에게도 잊히지 않는 여름날의 멋진 추억 하나쯤은 있겠지요?


이번 여름은 어디로 여행 갈까? 지중해를 바라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놀라운 건물 가우디 성당을 다시 찾아가 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이 애정하는 포도주 와인 한 병 사 들고 생선, 채소, 과일에 올리브유를 듬뿍 기름지게 버무린 10유로짜리 가정식을 제공한 지중해 마을시장으로 다시 찾아가 볼까?..


아니면 젊은 시절 애인으로 붙어 다녔던 지금 아내와 신혼여행지로 다시 가 볼까?.. 그것도 아니면 프랑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상쟁피에드 포트 (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하여 피레네 산맥의 시골길을 따라 한 달간 산티아고 (Santiago) 순례길로 떠날까?.. 우유부단한 햄릿처럼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해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궁리에 궁리만 거듭하다 결국 허무하게 삼복더위를 지나 입추를 보내고 말았지요.



어쩔 수 없이 여행을 포기한 다른 이유는 이번 여름 어번 스케칭 (Urban Sketching) 그림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미술 선생님의 섬세하고 엄격한 아우라(Aura)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작품을 완성하는 스케칭 숙제는 마무리해야 했지요.


스케칭의 주제는 '나의 여름 추억'이지요. 한적한 풀벌레 울던 기억도 희미한 어릴 적 고향집의 여름날 평범한 풍경 한 점 쓱쓱 그리며 콧날이 시큰해지는 추억의 앨범 같은 저만의 기억을 더듬어 냈지요. 꽃대궐도 아니고 풍광이 수려하지도 않은 고향집을 말입니다.


입시준비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저에겐 한적한 도시의 변두리 대낮 풀벌레와 늦은 저녁매미소리가 현악 4중주처럼 들리던 고향집은 힘겨운 현실 속에 달콤하고 씁쓸한 카카오 맛 같은 안정감을 주었고, 영화 배트맨의 지하 속 아지트처럼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혁명과 도전을 꿈꾸는, 미래로 가는 우주정거장이었지요. 검정 베레모를 쓴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 (Che Guevara)의 사진과 평전을 덕지덕지 붙여 놓았던 아늑한 다락방 낡은 책상도 품어 주었던, 아~나의 고향집!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고향집에서 보낸 여름방학의 나날을 상상하고 회상했지요. 창을 열면 복숭아 달리아 화분과 담장을 얌전히 타고 오른 매일 벽을 타고 저의 꿈과 함께 중력을 거슬러 올랐지요.


마당 너머 버드나무 몇 그루 서 있었고 나무와 나무사이 빨랫줄들이 걸려 있었지요. 마당에서 웃통을 벗고 우물 한 바가지 퍼서  들어붓고, 땀에 절은 옷가지들을 빨래통에 담아 땀이 비처럼 쏟아지도록 북북 밟아 비눗물을 빼고, 힘껏 공중으로 털어 빨랫줄에 걸치곤 했지요.. 그때 그 시절 이모 할모님이 가르쳐 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노래 한 자락 흥얼거리며 말입니다.


입추가 지난 주말 휴가를 받은 친구가 부모님이 살던 시골 빈집에서 며칠 지내자 연락이 왔답니다. 이불이랑 집 가재도구는 십여 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그대로였지요. 우리는 함께 집청소도 하고 웃통을 벗은 채 빨래를 하고 여름날의 마지막날의 휴가를 보냈답니다. 마을 어귀의 동네 마트에서 구매한 토스트 한 조각에 쨈과 치즈를 발라 입에 물고 캔맥주 한 모금 캬아~ 하며 스케칭 하던 도화지에 수채화 물감을 입혀 마저 남은 그림을 완성했지요. 그림 속의 빨래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보다 더 멋지게 빨랫줄에 걸렸지요. 폭염의 지긋지긋한 나날을 시원하게 뚫어준 저 빨래처럼 내 인생도 하얗게 빛나고 있다며 싱긋 웃었지요.


다락방에서 꿈꾸던 것만큼 세상을 크게 바꾸지도 못했으므로, 여전히 존경하는 체 게바라 (Che Guevara) 형님과 스티브 잡스 (Steve Jobs) 형님보다 오래 살아 있음에 죄송 하기는 하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 하고 국방과 납세의 의무를 단 한 번도 체납하지 않았고, 경영하는 회사 동료들의 성장과 성과급을 올리기 위하여 자리를 걸고 핏대 높여 변화를 일군 내 인생의 진정성을 인정받았지요.


시골집 여행을 마치고 귀경길 시장에서 옥수수를 삶아 파는 여든 살 넘은 할머니에게  삶은 옥수수 5개 한 봉지 오천 원이라 하여 샀지요 "할머니 더우신데 옥수수 삶기 힘들지 않으세요?" 인사하니 "몸도 아픈데 집구석에 있으면 하루가 너무 길어 시장에 나오지.. 인생은 짧고 여름날 하루는 너무 길어요" 하시며 마지막 떨이라고 한 봉지 덤으로 얹어 주시며 거스름돈 오천 원을 내주셨지요. 나는 "할머니 덕분에 여름휴가 마지막날 하루가 더 길어진 것 같으니 만 원어치 두 봉지 다 살게요"라며 거스름돈을 되돌려 드렸지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 (George Bernard Shaw)의 묘비명처럼 올여름 우물대며 째려만 보다가 내 여행 버켓리스트 (Bucket List)에 담긴 백야의 북유럽도, 한 달 살이를 꿈꾸는 지중해의 바르셀로나와 산티아고에 가지 못했지만, 그늘진 테라스 천장에 낡고 튼튼한 선풍기가 돌고 간간이 미풍이 들어오는 늦은 여름날 시골집에서 얼음에 담근 맥주 한꼬푸 하며 스케칭을 하는 이 재미를 누가 알까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데 옥수수 할머님은 인생은 짧았고, 여름날은 너무 길다고 하셨지요. 예술과 여름날은 동격으로 기나긴 것이니 나의 여름날의 예술은 하늘의 은하수처럼 길고 황홀한 여정이지요.  

시골집의 여름날 빨래가 있는 긴 여름의 하루 그 풍경을 노래 가사 한 줄로 선물합니다 받아 주실 거죠?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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