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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Mar 12. 2022

14. 목소리

혼잣말에 그칠지라도

읽고, 쓰고, 걷고.  이것이 나를 설명하는 동사다. 가끔 조용히 생각해 보곤 한다. ‘나는 왜 글을 읽고 쓰는가?’  젊어서는  다른 집 아이들을  가르쳐서 돈을 벌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돈과 맞바꾸고 감질나게 주어지는 시간들을 아끼고 아껴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때의 꿈은 글을 써서 적은 돈이라도 버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그 돈으로 다시 책을 사서 보고, 여행하고 다시 글을 쓰는 삶을 꿈꾸었다. 내 영토가 아닌 그곳은 신기루 같아서 꿈만 같았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멀고 멀었다. 꿈은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은 꾸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다 생각했다.


텅 빈 시간에 둘러싸인 지금도 나는 읽고 쓰고 걷는다. 하지만 없는 시간 쪼개서 읽던 그때의 절박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달리던 열차가 단번에 멈출 수 없듯이 관성에 의한 활동이라고 여길 때도 있다. 하지만 쓰는 일을 멈추면 내 목소리가 사라질 것 같아 차마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그림자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듯, 자기의 의견, 주장, 감각이 없는 삶 또한 살아있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권력에, 인습에, 완력에 나조차 어쩌지 못하고 세상의 모서리로 쫓겨나 울화가 치미는 날에는 조용히 틀어 박혀 글을 쓴다. 내가 쓰는 글 속에서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재구성한다. 힘에 눌려서 하지 못한 말들을 내 영토에서 거침없이 쏟아내면, 비 그친 하늘처럼 속이 말끔히 비워지고 세상은 좀 살만해진다. 나를 억압하던 힘들을 가볍게 무력화시킨다. 소극적 복수다.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고 했다. 30대 초반에 나는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아껴 두었다가 나중에 내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면 쓰겠다’ 했다.  내가 뱉은 호언장담이 나의 허세와 오만을 그대로 드러내고 내가 설 땅을 조금씩 좁혀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당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지금은 그렇게 절실하지 않으며, 그때와 마찬가지로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도 없으니 말의 진실은 시간에 붙어있다고 봐야 할지. 글을 통해 뭔가를 해보려던 마음도 짚불처럼 사그라들었다. 무정한 시간과 제멋대로 흘러가는 인생에 멱살 몇 번 잡히고는 서리 맞은 푸성귀처럼 고분고분해졌다. 이것은 일종의 놓음이다. 좋게 말해 놓음이고 나쁘게 말하면 비자발적 포기다. 어쩔 수 없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가 돼버린.


그래도 나는 쓴다. 쓰면서 나는 뭉뚱그려진 집단이 아니라 목소리를 가진 개인으로 완전해진다고 느낀다. 글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이제는 없으니 내 글이 완전무결할 이유도 없다.  안전한 글에서 비껴 있어도 함량 미달이어도 상관없다. 검열이 완전히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대체로 자유로운 편이다. 세상을 감각하는 순간에 대해, 무형의 생각을 유형의 글로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기록들을 통해 나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풍화를 거친 몸이 균형을 잃어도 눈빛만은 오래도록 살아있어 기록을 멈추지 않길 고대하며 나이 듦을 견디고 있다.  나의 노년이 그래도 희망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이승윤의 ‘흩어진 꿈들을 모아’를 여러 번 들었다. 자기만의 언어로 작사, 작곡을 하는 뮤지션이라 노래만 잘하는 여타의 가수들 속에서 단연 돋보인다. 가히 장르가 ‘이승윤’이다. 노랫말이 곧 시다. 노래가 시다. 더군다나 철학적이기 까지. 암튼 멋지다. ‘암튼’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 그때마다 약간 머뭇거리면서 나의 게으름을 마주한다. ‘암튼’이라는 말은 ‘암튼’ 문제다. 언젠가는 내 지난 모든 글에서 ‘암튼’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말 테다. 내게 있어 ‘암튼’은 지옥으로 가는 길에 널렸다는 부사만큼이나 매혹적이면서 치명적이다. 봐라. 암튼 때문에 구불구불 참 멀리도 왔다. 되돌아가자.


작은 거인 이승윤은 절망에 빠져 흘린 눈물이 아름답게 빛날 때, 무심코 밟은 작은 꽃들이 아랑곳 않고 일어설 때, 조각조각 찢긴 꿈들을 하나하나 붙여 희망이라 부른다 했다. ‘소글소글’ 나의 작디작은 블로그의 글들을 하나로 이어 줄 때 이것을  나는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 아직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감각들을.  쓰기 위해 쓰는 이 작은 몸짓을. 약한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예민해진다는 것을. 그리하여  목소리를 가지고 생명을 온전히 유지해 나간다는 것을.



202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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