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자. 지금은 우기다.
망고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편이
"발리는 지금 우기라서 어디선가 망고가 맛이 없다"라고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대신 스미냑이나 꾸따에 있는 마트에서 망고스틴을 저렴하게 사서 먹었는데 길리로 들어오니 마트는 보이지 않았고 호텔 조식으로 나오는 과일컵?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스노클링 하며 멀미가 나서 그런지 남편은 점심도 건너뛰더니 저녁때가 돼서야 배가 고프다고 했다. 아빠가 아프다 해서 그런지 아이의 사춘기 증세는 좀 잠잠했고 다 같이 자전거를 타고 화덕에 구워 담백한 피자를 먹으러 갔다.
지인의 추천이 있던 곳이라 피자 맛집이라 말하고 찾아간 건데... 그렇게나 피자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뜬금없이 파스타를 먹겠다고 했다. 누가 청개구리 아니랄까 봐 다시금 피자맛집이라 설명했지만 남편은 오일파스타, 아이는 까르보나라를 시켰고 나는 가지가 들어간 피자를 주문했다.
얼마 뒤 피자가 나왔고 양이 많으니 한 조각씩 맛보라했는데 남편은 가지가 맘에 안 든다며 먹지 않고 오히려 아이는 맛있다며 반 이상을 먹어치웠다.
그러고 파스타가 나왔는데...
"내가 피자 맛집이라고 했잖아. 그러니 피자를 먹었어야지!!!"라며 한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둘은 그렇게 파스타를 반 이상 남겼다.
아이는 그나마 피자라도 먹었지만 남편의 배는 차지 않았으니 뭔가 더 먹어야겠단 생각을 했는지 아까 자전거 타고 오면서 과일 파는 곳을 본 것 같다고 했다. 먼저 호텔로 아이를 보내고 둘이 과일가게를 찾아갔다. 여긴 어떻게 파나 싶어서 사람들이 주문하는 것을 보니 한국에선 익숙하지 않은 초록색 망고를 잘라 포장해 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익숙한 노란 망고를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초록색 망고만 있었고 나는 일단 먹어보자며 그린망고와 그린망고의 맛이 형편없을 때를 대비하여 파인애플도 포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어가 부족하니 미리 사 전조차를 했어야 했는데 남편과 아이랑 다니다 보면 차라리 무계획이 편해 대충 옆에서 지켜보다가 하나씩 달라고 말해놓고는 포장해 가는 걸 보니 그럴싸하게 해가는 것 같은데 돈을 얼마나 더 붙여 파는 건지 불안했다.
하지만 하필 우리가 주문하기 바로 직전, 외국 여자분께서 파티에 쓸 과일이라며 몇 박스를 주문하셨고 직원들은 재빨리 과일들을 손질하느냐고 너무 바빠보였기에 차마 나의 짧은 영어로 손짓발짓해 가며 물어보기 미안해 일단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과일값은
파인애플 25000루피아, 그린망고 35000루피아, 총 55000루피아였는데 한국돈으로는 대략 오천 원?? 정도였는데... 포장까지 완벽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우리가 영어로 대량주문하는 손님을 신기하게 보느냐고 가게 주변을 살펴보지 못한 건데 과일이 진열된 곳 아래 가격이 적혀있었고 길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물가가 비싼 것치고는 과일도 싱싱하고 포장도 아주 완벽했고 값도 적당했다.
오래간만에 과일다운 과일을 본 것 같아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돌려 호텔에 도착했고 함께 포장되어 있던 라임을 뿌려 맛이 없을 것 같다던 그린망고를 먹었는데...
'엇! 맛있다!!!'
한국에 수입되어 오던 노란 망고는 너무 물컹거리고 양도 적었는데 그린망고는 크고 좀 단단했고 맛도 아주 좋았다! 남편은
"이거네!! 누가 맛없다했어!! 이거 되게 맛있네!! 더 사 왔어야 했어!! 가격도 저렴하고 포장도 잘해주고 내일 여기 또 가자!!!"
여행의 목적이 그린망고가 된 사람처럼 신이 났다.
그린망고 맛없다고 하니 우리가 기대를 아예 안 해서 더 맛있었던 것 같지만 나는 내가 직접 물 묻히고 손질하지 않아도 깔끔하게 포장해 주니 그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야~ 근데 우기라고 망고도 맛없다더니 우기가 아닌가 봐. 우리 오고도 며칠이 지났는데 비가 안 온다?"
"그러네. 비가 좀 와야 시원해질 것 같은데. 낮엔 너무 더워. 비 구경 좀 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잠이 들었다.
아... 말이 씨가 된 건가...
낮의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달궈진 내 몸을 자면서 몸을 벅벅 긁다 지쳐 눈을 떴는데 평소와 달랐다. 뭔 일인가 싶어 출입구 쪽 커튼을 슬쩍 열어보았더니 비가 억수로 오고 있었다.
"오~~ 비 온다!! 오늘은 좀 시원하겠네!!!"
난 너무나 단순한 발상을 한 건데... 지역의 특색을 고려하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곳은 길리...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없어 다른 곳보다 매연 따윈 느낄 수 없었고 항구 쪽 메인도로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정비가 되어 있어서 다닐만했다.
문제는 섬의 안쪽...
하필 난 왜 빨래를 맡기겠다고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왜 뒤늦게 꼬치맛집을 찾겠다며 걸어 다닌 것일까...
말이 있으니 똥오줌도 쌀 것이고, 울퉁불퉁한 길에 자전거가 다니기 힘들 것이고, 동남아는 스콜성비가 내리니 순간적으로 비가 엄청 와서 걸어 다니기 조차 힘들 거란 생각을 왜 잊었을까...
비가 그치니 호텔 주변은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자전거 바구니에 빨랫감을 넣고 세탁소를 찾아 섬 안으로... 안으로...
"으윽!! 뭐야!!! 길이 왜 이래!! 으아아아아악"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아서 키높이 크록스를 신고 간신히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물로 덮긴 길을 다니다 보니 길이 파여있는 줄도 모르고...
내 발은 그렇게 첨벙... 첨벙...
입방정 떨지 말걸...
비가 오면 많이 불편해질 거라고 듣기도 하고 알아보기도 한 후 숙소를 큰 길가 쪽으로 잡은 건데 안으로 들어와 보니 이런 환경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들에겐 익숙한 환경이기에 아무렇지 않겠지만 관광으로 살고 있는 곳에 막상 현지인들은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 와중에 산호에 쓸린 내 다리 상처들과 미친 듯이 돋아나 있는 내 피부들이 이런 빗물에 괜찮을까 염려도 되었지만 그런 걱정만 하고 있기엔 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길리에서의 마지막 밤...
남편은 배가 아프다며 저녁을 건너뛰고 나도 그다지 생각이 없어서 아이만 룸서비스를 시켜주어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또 다른 직원이 작은 케이크와 카드를 전달해 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기분 좋은 서비스였지만 하필 케이크 좋아하는 남편은 배탈이 나서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길리의 마지막 밤이라는 건 4주간의 우리의 여행의 절 반이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기분이 참...
내 평생 진짜 어렵게 마음먹고 길게 여행 간 건데 한국에 있을 때보다도 하루하루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급 우울해졌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아직도 여행기간이 많이 남았음에도 내 배가 부른 건지 나의 기분은 오락가락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