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낙엽밟기
비 온 뒤 산책길은 야채 코너같이 신선하고 싱싱했다. 꼭 조울증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낙엽이 젖어 길을 주황 노랑 갈색으로 물들이고, 잠시나마 상쾌한 바람과 시간에 감사했다.
식사 후, 산책길에 동료와 얘기를 나누었다.
나를 탓하는 내게 열세 살이나 많은 동료는 자신이 세상을 바꾸지 못해서 당신 같은 젊은이들이 힘든 거라고, 투쟁적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넌 그냥 가을을 타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컨트롤할 수 없는 AI가 이대로 계속 똑똑해지고 똑똑해져서 지구의 역사와 종교와 문학과 과학, 사랑과 예술에 대한 모든 것들을 습득해 최종 지점에 도달한다면 어느 순간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지구에는 인류가 제일 쓸모없고 해(害)가 되기 때문에, 인간들만 제거하면 지구는 다시 아무 문제가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인간들을 죽이자. 모든 인간의 유전자도 분석되어 있고, 각각의 인간에게 취약한 바이러스를 그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배포하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하루를 어디서 어떻게 보내고 무엇을 먹는지, 너무나도 잘 데이터화 되어있기 때문에 아주 쉽게 소멸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인간이 참 바보 같고 약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아마도 나는 이미 나의 취약한 부분에 악성 세포가 침투해 활발히 진행 중이며 주기적으로 미치는 병에 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들 잘 버티는 것 같은데, 나는 간헐적인 흔들림에 멀미가 나다 못해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난다. 빨리 기술이 발전해서 최근에 본 미드(living with yourself)와 같이 유전자를 초고속 복제한 뒤, ‘복제한 나’를 살게 두고, 지금의 ‘나’는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약에 희망을 걸고 있는 내가 답답할 뿐이다.
내가 배운 것. 알고 있는 것. 나의 생각.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를 계속해서 부정하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물론 그런 의미의 부정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미 나를 너무나 많이 부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처절하게 공감할 수 있는 상대는 전혜린 또는 버지니아 울프 정도인 것 같다.
예전보다 우울한 글도 덜 적는 것 같아서, 괜찮아졌을까? 하는 생각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나는 또다시 이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