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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Apr 19. 2016

그녀가 두 눈에 걸어 들어온 밤

그녀의 계절에 물들던, 설레던 밤


 사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카페. 태양도 유리창 모퉁이를 향해 느긋한 포물선을 그리는 오후. 거리의 이름 없는 그림자들은 카페 안을 비스듬히 기웃거리다가, 회색 벽면에 스며든다. 나는 머그잔에 든 쌉쌀한 커피를 머금고 상념을 이어갔다. 그리곤 빨래판처럼 꺼끌꺼끌한 입천장에 혀끝을 문질러 보았다. 솟아오른 붉은 육지로 인해, 검은 물은 둘로 갈라지다가 병목에서 철썩 파도쳤다. 이번엔 머그잔을 가만히 흔들자, 가라앉았던 문장이 찰랑이는 수면까지 떠올랐다. 나는 그것이 침전할세라, 새벽녘 이슬처럼 받아마셨다. 모니터에는 '커서'가 노란 신호등처럼 재촉했으며, 혈관을 따라 손끝까지 내려온 문장을 받아 적었다.


 잠시 후, 좁고 기다란 테이블의 대각선 방향. 한 여성이 다가와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곤 노트북과 책을 철옹성처럼 쌓아 올렸다. 그녀는 나를 45도 반대로 등지고 앉았다. 나도 평행한 사선(斜線)이 되게끔 고쳐 앉았다. 간혹 달아나는 문장의 꼬리를 쫓다가 그녀의 시선과 충돌했지만, 본래의 네모난 자리로 고정시켰다.


 나는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때 한 남성이 내 맞은편에 섰다. 통통했지만, 노란 귤처럼 여드름 난 얼굴이 귀여웠다. 하지만 망설이는 몸짓과 갈 곳을 잃은 두 손은 공기를 불연속적으로 흔들어 놓았고, 나와 어울려 뒹굴던 심상마저 쫓아냈다. 그는 흰색 니트 위에 회색 조끼를 입곤 지퍼를 목까지 걸어 잠갔다. 마치 닭 모가지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내 얼굴도 한 번 훑더니, 그녀와 나의 접점이 있는지 살피었는데, 둘 사이의 다른 공기를 확인하곤 날카로운 눈초리를 거두었다. 모든 게 찰나에 지나갔다. 그리곤 그녀에게 조심스러운 운을 떼었다. 나는 이어질 문장을 눈치채곤, 가능한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동시에 이어폰 볼륨을 줄이고 짐작한 문장의 빈칸이 맞는지, 고막을 팽팽히 당겼다. 예상대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으며, 연락처를 물어보는 대화였다. 그녀는 당황해 보였고, 주위의 무심한 척 엿듣는 귀를 의식했다. 그리곤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서툴러서 귀여웠지만 조금 안쓰러웠다.


 그는 불편한 공기만 남기곤, 발자국을 회수해 떠났다. 그녀의 타자 속도는 전보다 빨라졌고, 네모난 자리를 난타했다. 분명 친구와 메신저로 대화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추측해보건대, 더러 있는 일인 듯 문장에 무심함을 담았을 터이다. 문장의 간극을 넓히는 엄지 손과, 간극을 파괴하는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의 분주한 움직임이, 이를 증명했다. 문장을 전송하는 손에선, 도도하고도 명쾌한 소리가 났다. 비록 커피잔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두 눈에 떠오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무심한 시선을 넘기던 중,
한 지점에 머물렀다


 그녀의 두 홍채처럼, 갈색으로 물들던 계절이 떠올랐다. 책이 낙엽처럼 소도록하게 쌓인 중고 서점, 늦은 시간이라 드물어진 발소리만큼 공기 중에 부유하는 상념들도 적었다. 나는 가을밤처럼 서늘해진 통로를 거닐며 갈대 같은 책장의 결을 손으로 쓸어보던 중이었다. 초침처럼 넘어가는 책장을 따라 가을은 초침만큼 가까워졌으며, 한 지점에 시간이 머물렀다. 한 여인이 있었다. 여타 행인들은 갈대처럼 바람에 넘실댔지만, 그녀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고정되었고, 또 고립되어 있었다. 암막에 비친 그녀는 배경과 분리된 것처럼 보였고, 한편으론 점으로 촘촘히 그려낸 인상파 작품 같았다. 부분을 확대하거나 전체를 담을 때마다 다른 자태를 자아냈다. 나는 그녀를 담기 위해 조리개를 바짝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그녀의 책을 굽어보는 두 눈꺼풀은, 달을 덮는 태양처럼 가장자리부터 영역을 잠식해 나갔다. 초승달처럼 가녀리게 남은 각막은 그녀의 손목만큼 새하얗고, 또 내밀했다. 반듯한 코는 동백나무의 줄기처럼 힘 있고, 흠집 하나 없이 고귀했으며, 줄기에서 두 갈래로 뻗은 가지는 좌우 대칭을 이루었다. 마치 휘어진 활처럼 탄력적이지만 동시에 부드러웠다. 입술은 햇사과처럼 붉고 윤택했으나,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반달같이 차가운 얼굴에 비쳐 더욱 붉게 발했는지 모른다. 검은색 옷은 달빛을 시샘하고 방해하는 구름 같았지만, 오히려 고귀한 분위기를 강조할 뿐이었다. 나는 그 인상을 계속 음미하고 싶었지만, 행여 흐트러뜨릴까 봐 조심스러운 시선만 면면히 이어갔다. 그녀는 조만간 갈대숲으로 떠날 터였다. 첫눈에 반한 이성을 붙들어 두고 싶거나, 말을 걸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러한 정념에 사로잡혀 고뇌한 적도 없었다. 나는 망설였고, 한번 더 망설였다. 용케 결심을 내리고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배경 속으로 스며들었고 번진 자국만 남겼다.


 나는 밀려드는 발걸음 틈을 연어처럼 비집고 거슬러 올랐고, 시선을 낚싯줄처럼 멀리 던졌다.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공기를 가르다가 호수에 툭 떨어졌다. 나는 낚싯바늘처럼 샅샅이 찾았으나, 아무런 흔적도 건져내지 못 했다. 낙심과 실의로 점철된 가을밤만 무심히 깊어졌다. 왜 용기 내지 못했을까. 만역에 깔린 갈색 빛깔은 쉬이 부서졌으며, 새벽녘 서리 맞은 풀잎처럼 쓰러졌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일직선상에 정렬한 순간이었다


 번민에 젖어 체념하곤 문구 코너에 갔다. 그런데 그곳에 그녀가 있다. 그 순간, 태양계의 행성들이 일직선상에 정렬하고 우주가 하나로 맞물린 것이다. 내 마음은 태양 폭풍을 흠뻑 맞은 자기장처럼 본래의 기능을 잃었고, 계절이 요동쳤다. 가을을 품고 온 바람이 깎아지른 절벽 틈새마다 물들이더니, 내 가슴의 성긴 스웨터 틈까지 파고든 것이다. 오래된 엔진처럼 동력을 잃은 심장까지 후벼 팠더니, 틈새마다 낀 푸르스름한 이끼마저 갈색빛으로 비틀었다. 동시에 내 마음의 무심함이며 쓸쓸한 감성마저 비틀어지고 부서졌다. 마침내 그녀에 대한 생각만이 채에 걸러졌다.


 그녀는 미술 도구 코너에 머물렀다. 고개를 숙이곤, 시선을 어두운 구석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떨어진 거리는 몇 걸음 남짓이었다. 물리적으론 가까웠지만, 심리적으로 유리되었고 철저히 고립되었다. 심장에선 심해의 고래가 부르는 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인생에서 수많은 범부 중 하나로 비칠까 봐 망설였다. 그녀는 '헌팅'이라는 격하된 말이 아닌, 진중한 마음을 읽어주길 바랐다. 또다시 그녀가 배경으로 스며들기 전 결정을 내렸다. 행여 그녀가 주위의 시선 때문에 불편할까 봐, 낯선 발걸음이 사라지길 잠시 기다렸다. 다시 몇 초간 기다렸고, 한 번 더 기다렸다. 마침내 행성들이, 다시 한 번 일렬로 줄지어 섰다.



두 개의 달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이 내 눈을 멀게 했다


 떨리는 마음을 떨치기 위해 종아리 근육에 힘을 가했다. 찰나에 일이 벌어졌다. 통나무처럼 딱딱해진 다리가 제멋대로 그녀 앞으로 갔다. 큰 개를 산책시키듯 발걸음에 끌려갔다. 두 다리는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녀 얼굴에 뜬 월식은 걷혔고, 두 개의 달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이 내 눈을 멀게 했다.


 잠시 동안 우리의 시선은 공기 중에서 부딪쳤으며, 그만큼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영롱한 눈빛에 내 얼굴은 환해졌고 미세하게 떨렸다. 마침내 나는 시린 입술을 열었다. 양 끝 저울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세계를 부서뜨리며 말을 꺼냈다. 옅은 미소를 띠며 '괜찮다면, 아는 사이로 지내고 싶다'고 용기 내었다. 신중했으며, 신실했다. 태양 흑점에서 폭발한 열기를 느꼈다. 붉은 폭풍은 하얀 각막 경계선의 방호벽까지 무너뜨렸다. 그녀의 얼굴도 붉어졌고, 잠시 망설였다. 행여 그녀가 고귀한 층계참에서 내려오거나, 또는 빗장을 건 입술을 쉬이 열어선 안되었다. 난 무릎을 낮추는 사람이어야 했다. 내 존재는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이길 바랐다. 겨우내 그녀를 그리며 겪게 될 고통에 비하면, 낙엽처럼 계절을 잃거나 부서지는 것은 감내할 수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용기 내었다.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고, 그녀의 볼은 한층 더 붉어졌다. 이번엔 그녀가 고요한 선분에 사선(斜線)을 그었다. 나에게 나이를 물었고, 나는 간단히 답한 뒤 연락해도 될지 물었다. 서로는 조리 없는 말만 늘어놓다가 연락처를 받았다. 그것을 품에 꼬옥 쥐고 헤어졌다.



두 개의 달빛이 걸린 가을밤이다


 심장에선 또다시 심해의 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감미로운 노랫가락이었고 오랫동안 멈추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 파동은 네모난 모서리까지 일다가 잠잠해졌다.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처 못다 한 자기소개를 했고, 서로의 이름을 알았다. 간단한 대화를 나눴고, 만남을 약속했다. 서로 구입한 책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고, 난 그녀의 계절에 낙엽처럼 물들기 위해, 같은 책을 구입했다. 두 개의 달빛이 걸린 밤이다. 작은 창문과 내 손안에. 아련하고, 또 은근한 밤이 소도록하게 내려앉았다.


글과 함께한 음악♪ (가수-음악)

* 짙은(Zitten) - S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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