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사람은 왜 살까?
딸의 질문에 당황했다
모처럼 딸과 시원한 드라이브 길이다. 바람도 쐴 겸 항구가 있는 서해로 향했다. 에어컨 바람 대신 차창을 열어 손을 내밀면 자연 바람이 온몸으로 들어온다. 자유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몸을 내맡기면 그게 자유다. 삶이라는 구속의 올무에 걸려 세상의 전쟁터에서 서로 힘겨워하는 두 명이 이렇게 자유를 찾아 떠났다. 아빠는 돈 버느라, 딸은 공부하느라. 사실 돈과 공부는 표면적인 올무이고,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가 제대로 된 속내일 것이다. 삶에 치이고 돈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애틋함이 통해서 의기투합해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 탈출하면서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딸이 갑자기 질문한다.
“아빠!”
“왜?”
“나 대신 죽을 수 있어요?”
“?”
“엄마는 나 대신 죽을 수 있다고 하는데, 아빠도 죽을 수 있어요?”
“......”
“네?”
“그때 보고”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라 대답이 궁색했다. 딸의 얼굴을 살짝 보았다. 급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당연히 아빠가 나 대신 죽을 수 있다고 얘기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순간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나 또한 여섯 살짜리 아이의 질문도 아니고 스무 살이 된 딸의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라며 속으로 고민했다. 그런 생각하는 사이 딸의 독촉에 “그때 보고”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고 침묵 속에 차만 앞으로 굴러갔다.
며칠 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대신 죽을 마음이 없었을까? 주변 여자분들께 말해 보았다. 대부분 한결같이 왜 그렇게 답변했느냐며 다그친다. 남자들은 도망칠 궁리만 먼저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까지 있었다. 거짓말이라도 당연히 대신 죽을 수 있다고 얘기해야 한다는 말이 거의 전부다.
`그때 내가 순간적으로 고민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말의 무게’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직장 생활하며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터득한 것은 책임지지 못 할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확정적이고 확실하지 않은 질문에는 명확히 대답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대충 본질을 흐리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며 책임지지 않는 방식을 배웠다.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통해 몸이 터득하고 입술이 기억해서 말하고 있다. 아마도 순간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왜 죽어야 하지라는 의문도 생겼을 것이다. 감성이 아닌 이성의 뇌가 지배하고 있다. 여성보다 남성이 더 논리적, 이성적인 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변명의 말들만 무수히 난무한다. ‘어쨌든 아빠잖아!’ 이 한마디에 더 이상의 말은 궁색해진다.
부모님은 어땠을까?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과연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만약에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분명히 자신을 희생하시고 막내아들을 살리셨을 것이라 확신한다. 왜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분들의 살아온 삶을 나는 안다. 그 삶이 대신해 준다. 그분들에게는 "헌신이라는 단어가 몸에 배 있고, 희생이라는 언어가 말속에 감춰져 있고, 사랑이라는 따듯한 감성이 행동에 녹아 있다." 과거의 모습이 미래의 행위를 연상하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얼마 전 안성에 있는 노주현 카페에 들렸다. 거기에는 야외에 항아리가 줄 서 있는데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 두툼한 항아리를 보며 넓고 깊은 부모님의 마음이 그리워졌다.
[항아리]
믿는 구석
든든한 빽으로
실수에도 거짓에도
눈 감아 주시던
내 아버지, 내 어머니
그 무거운 무게를
이제야 느끼게 됩니다.
어린 시절 두 분 곁에서
말없이 받기만 한,
그 사랑이 너무 그립습니다.
<안성의 노주현 카페에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인간 세상으로 쫓겨난 천사 미하일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세 가지 대답을 알아야 했다. ‘인간 내면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구두 수선공을 통해서 찾았다.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고,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죽음의 시기를 아는 것이고,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만 산다`는 이치를 깨닫는 순간 미하일은 다시 천사가 되었다.
결국, 사람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사람 인(人)자는 서로 받쳐져야 서 있을 수 있다. 절대 혼자 설 수 없다. 받쳐주는 것, 그것은 부모와 자녀의 또 다른 이름인 사랑이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믿음직한 뒷 배경이 되고 힘겨울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부모고 그게 아빠다.
내 가족 건드리는 놈은 가만두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회사 동료의 추천으로 우연히 재방송을 보다 매료되어 전편을 그것도 돈 주고 봤다. 다양한 캐릭터들과 주인공 이선균의 역할을 보며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는 드라마다. 대사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 가족 건드리는 놈은 가만두지 않는다’며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며 가슴 뭉클했다. 무모해 보이는 상대와 맞서서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에서 ‘과연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나약한 나의 모습이지만, 내 가족 내 딸에게 위험이 닥쳤는데 이성적으로 맞고 틀리고를 생각하는 아빠가 과연 있을까? 드라마의 이선균처럼 먼저 뛰어들고 볼 일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부모의 역할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는 너무 이성적인 삶을 살고 있다. 가끔 이성이 아닌 감성의 지배를 더 많이 받고 싶다. 가족에게는 판사의 잣대가 아니라 변호사의 역할이 필요하다. 맞고 틀리고의 접근이 아니라 ‘섭섭했겠다’ ‘당신이 옳다.’ ‘네 말이 맞다’의 감성적인 단어가 가족을 사랑이란 울타리로 하나 되게 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무장은 되어 있지만, 행동으로 잘 이어지지 않아서 문제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정이라는데, 이론이 행동으로, 머리가 가슴으로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막힌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젠 다시
“아빠, 나 대신 죽을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연하지, 딸! 네가 누구 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