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물 항아리

by 배추흰나비

내가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되었을 때 아빠는 산을 깎고 집을 지었다. 낯 선 아저씨들이 웃옷을 벗어젖히고 요란한 기계로 커다란 나무를 자르고 싹싹 소리를 내며 대패질을 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새로 지은 우리 집 중에 가장 혁신적으로 느껴졌던 공간은 부엌이었다.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했지만 수도꼭지가 부엌 안에 있었고 시멘트를 발라 높다랗게 만든 설거지 그릇도 있었다. 아직 집집마다 펌프도 별로 없던 때라서 대부분의 동네 아줌마들은 마을 중간에 자리한 공동우물에서 물을 긷고, 빨래를 했다. 그러니 우리 동네에서 부엌에 서서 설거지를 한 첫 번째 사람은 엄마였을 것이다.

엄마는 공동 우물을 싫어했다. 내가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랑 숨바꼭질을 하다가 꼭꼭 숨어버린 동생 찾기를 포기하고 다른 친구와 놀러 가버렸을 때, 아랫집 성범이 엄마가 우물에 빠져 다 죽어가는 동생을 두레박으로 건져낸 사건 때문이었다. 멋 모르고 친구와 놀다 기분 좋게 집에 들어왔다가 엄청나게 매를 맞아야 했다. 때리는 내내 울던 엄마 때문에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못 찾겠다 꾀꼬리 했는데 쟤가 안 나왔다고.’만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다.

새로 만든 부엌에는 작은 방에 불을 넣을 나무 아궁이도 있었고 안방을 덥혀 줄 연탄아궁이도 있었다. 그즈음 다른 친구들 집에도 대부분 이렇게 두 가지의 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석유곤로도 있었는데 나에게 그 물건은 너무나 무서운 것이어서 잘 만지지도 않았다. 석유곤로에 대한 두려움은 또 다른 기억에 있다.


어느 날, 외갓집과 오 분 거리에 살던 나에게 친구들이

“너네 외갓집에 불이 났대!”

하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간 적이 있다. 헐레벌떡 외갓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불은 이미 꺼져 있었는데 할머니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나나가 제 엄마한테 빨래방망이로 맞고 있는 중이었다. 나나(나중에 중학교에 가서야 그 아이의 이름이 ‘나나’가 아닌 ‘난화(蘭花)’라는 것을 알았다)가 고무 대아에 잔뜩 쌓인 빨래를 보고는 빨래를 삶으려고 석유곤로에 불을 붙여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마침 밭에서 돌아온 나나 엄마에게 발각되어 불은 크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석유곤로와 고무 대아와 빨래까지 망쳐 놓았던 아이로 나나는 내내 놀림을 받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가 엄마를 도울 생각으로 했던 일인데 소리를 꽥꽥 지르며 매타작 하던 나나 엄마나, 그런 친구를 놀리던 우리들까지 너무했다 싶다.

새로 지은 우리 집에서 가장 혁신적인 공간인 부엌에는 남들과 다른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따듯한 물 항아리였다. 부뚜막 맨 끝 쪽 연탄아궁이 옆에 어울리지 않게 항아리 뚜껑이 올라와 있었다. 그 뚜껑을 열어보면 김칫독을 묻어 둔 것처럼 부뚜막에 항아리를 하나 묻어 놓은 모양을 보게 된다. 겨울날 아침에 눈곱도 떼지 못하고 세수를 하겠다고 부엌으로 가면 엄마는 항아리를 열고 김이 폴폴 오르는 더운물을 퍼주셨다. 친구들에게 더운물이 늘 준비되어 있는 항아리 자랑을 하면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며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의심 많은 몇몇 친구들은 구경을 오기도 했다. 나는 남들이 갖지 못한 들키고 싶은 보물 상자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한 겨울 아이들과 마당에 모여서 구슬치기나 공기놀이를 한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몰고 가서 부엌에 모여 앉히고는 물항아리에서 더운물을 퍼서 다 같이 대아에 손을 담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구슬치기나 공기놀이는 왜 겨울에 했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물 항아리는 어릴 적 나에게 행복을 만들어주는 화수분이었다. 어떤 원리로 항아리에 물이 따뜻해지는지 몰라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항아리에서 엄마가 빨간 바가지로 뜨거운 물을 푹푹 퍼서 대아에 담아주던 모습이 선하다. 이런 이야기를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갑자기 나는 늙은 사람이 된다. 아궁이는 고사하고 연탄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더운물이 나오는 항아리 이야기라니. 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이런 날이면 엄마가 물 항아리에서 떠 주는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언제부턴가 저려오는 손가락 마디마디를 엄마에게 맡기고는 우리 집 벤치를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는 게으른 고양이가 언제쯤 새끼를 낳을지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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