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제
내일 저녁은 갈빗집에 가서 먹을 거야
어제 함께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말했다. 남편은 왜? 나는 표정이다.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
벌써 결혼한 지 28년이 되었다니 감회가 새롭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가족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걱정을 잔뜩 하며 결혼했는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나는 전적으로 나의 인내가 이 결혼을 유지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나의 생각일 뿐이다.
나는 그렇더라. 결혼기념일에 보면 다 남자들이 선물을 준비하더라고. 결혼은 같이 하는 거고, 그것을 기념하려면 둘이서 같이 선물을 준비하고 서로 축하해주고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친구들 보면 결혼기념일에 선물을 받았네 안 받았네, 뭘 받았네 난리야 그냥. 결혼기념일이 다가온다고 뭐 선물할 거냐고 닥달하는 아내. 나는 별로더라.
남편이 반색을 하며 나의 의견에 동조한다.
우리는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만났다. 남편이 사회를, 내가 부케를 받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워낙 차가운 성격이었지만 남편은 적극적이었다. 사귀자는 말을 들을 적이 없다. 결혼식장에서 만났던 내 친구들을 꼬드겨 내 직장을 알아내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결혼하자고 했다. 뭐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이 다 있나 싶었는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왔다. 어느 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약국에서 나오는 거였다. 거의 매일이었다. 나중에 왜 나를 만나러 올 때 약국에는 왜 갔었는지 물어봤더니 쌀쌀맞은 나를 만나려고 생각만 해도 소화가 되지 않아서 소화제를 사 먹었다고 했다.
안 그럴 것 같았지만 결혼을 하고 남편은 대한민국 표준 남편이 되었다. 물론 28년 전 표준이다. 경상도 남자도 아니면서 하루에 몇 마디 하지 않았다. 다정하지 않았고 무뚝뚝하게 말했으며 나의 하루에 대해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다.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한 사람으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 해 내야 한다. 그러니 엄마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제대로 해야 했다. 힘에 부친할 일들에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나는 결혼생활동안 남편의 새벽출근에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은 날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케익을 준비할 테니 당신은 선물을 준비해. 결혼기념일이라고 따로 챙긴 적도 없고 선물을 주고받은 적도 없으니 공.평.하.게. 나는 케익, 당신은 선물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나는 케익을 준비하겠지만 남편이 선물을 준비할 가능성은 제로퍼센트다. 괜찮다. 아직까지 서로의 옆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