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엄마가 보고 싶은 밤

by 배추흰나비

저녁시간에 심심해진 남편과 나는 동네 대패 삼겹살집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씩을 나누기로 한다. 독거노인 미팅하듯이 서로 나누는 말도 없이 앉아서는 바짝 구워진 삼겹살에 마늘을 얹어 먹고 설렁설렁 집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한쪽 고무장갑에 구멍이 나서 쓰지 못하고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우리는 잠깐 슈퍼마켓에 고무장갑을 사러 가기로 했다. 고무장갑을 사러 갔다고 고무장갑만 보겠는가. 오랜만에 둘이서 슈퍼에 왔으니 차에 두고 먹을 사탕이나 초콜릿을 사기로 한다. 한가한 우리는 100g당 단가까지 철저히 따져서 살펴본 결과 목이 시원해지는 사탕은 봉지에 든 것보다 통에 든 것이 그램당 4원이 더 싸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함께 분노했다. 그래서 통에 든 사탕을 남편 몫으로 고른다. 단 것을 즐기지 않는 나는 72%의 카카오가 들어 있는 초콜릿을 골랐는데 남편은 나를 객기 부리는 여자라며 사실 맛이 없지만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먹는 것 아니냐며 핀잔이다. 티격태격 이것저것 주섬주섬 카트에 담다가 남편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이, 해봐.”

나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하지만 이십 년을 참아 왔으므로 이번에도 참기로 한다.

“당신이 해봐. 이.”

남편은 자랑스럽게 내 앞에다 얼굴을 들이밀며 상추가 낀 이를 드러내 보인다.

“나야 자랑스럽지. 너도 해봐. 이.”

굳이 사람들이 많은 슈퍼에서 내 치아를 들여다보겠다며 재촉하는 남편에게 마지못해 이를 보인다.

“야, 너는 왜 그렇게 이가 못생겼니? 나 좀 봐봐. 얼마나 이쁘냐?”

남편은 기분 좋게 웃으며 술기운 도는 붉은 얼굴로 나를 놀린다. 순간 억울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와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당신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송곳니가 조금 작다 뿐이지, 치열이 고르지를 못한가. 아니면 덧니가 있나! 이제까지 썩은 이도 하나도 없는 내 이를 가지고 심심하면 트집이야! 좋은 이야기도 하루 이틀 이랬어. 만약에 또다시 이를 가지고 뭐라고 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남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어이구, 되게 뭐라고 하네.’하며 중얼거리는 것으로 사건은 끝이 났다. 결혼하기 전, 나에게는 미래의 남편에 대한 작은 소망이 있었는데 ‘이가 고른 남자’와 ‘손가락이 길고 고운 남자’였다. 나는 앞니에 비해 양쪽 송곳니가 작아서 거울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었다. 그래서 나는 앞니고 송곳니고 모두 크기가 같은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지 내가 낳을 자식들이 치아가 예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람대로 치아가 고르고 손가락이 긴 남자와 결혼을 해서 치아가 고른 아이들을 낳았으니 내 계획에 딱 맞았지만, 가끔 한 번씩 툭 던지는 말에 상처를 받는다. 분이 풀리지 않은 나는 남편 뒤통수에다 한마디 보탠다.

“당신과 다르다고 객기 부린다고 판단하지 마요. 세상에는 99%의 카카오도 맛있어하는 사람이 있는 거고,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하루가 시작되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내가 당신이 사탕 좋아한다고 뭐라고 합디까? 치아가 고르면 뭐하나, 다 썩었지? 내가 밖에서 웃기만 해도 사람들 다 쓰러져, 매력 있다고.”


“이, 해봐.”

이 말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직 흙더미 같았던 새 무덤 앞에서 고모들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엄마와 무척 닮았는데 치아 모양까지 똑같았다. 고모들은 나를 볼 때마다 내 이를 보며 ‘어쩜 너는 이까지도 엄마를 닮았니.’하며 엄마를 추억하고는 했다. 음식을 잘한다거나 스무 살이 지나서 쌍꺼풀이 생겼다거나 하는 것을 닮는 것도 신기한데 치아를 닮다니. 참 신기하고 신기한 일이다.

치아가 고른 내 아이들은 나보다는 남편을 더 닮아서 이사를 가면 동네에 내가 새엄마라는 소문이 돌았다. 내가 동안(童顔)이라 어리게 보이기도 하고, 딸은 또래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아들은 겉모습이 나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던 까닭에 그런 헛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장 본 물건들을 들고 집에 오면서 우리 아이들이 나를 닮지 않아서 다행인 것들과 나를 닮았으면 더 좋았을 것들을 혼자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부질없는 통계를 왜 내고 있나 싶다가, 그래도 서로의 좋은 점을 더 많이 물려받은 아이들에게 고맙다.

저녁 시간의 소주 한 잔이 불러온 그리움. 내가 닮은 엄마가 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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