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학청년 Oct 24. 2021

PD가 되고 싶다는 생각


2년 동안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면서 영상 편집을 배운 경험이 있다. 교수님들의 인터넷 강의를 찍거나 교내 행사 영상을 종종 찍곤 했는데, 이 재능을 살리기 위해 복학 후엔 미디어공학을 부전공으로 들었다. 복수전공이 아닌 부전공으로 들은 것도 어느 정도 타협을 한 것이다. 24학점이니까 8과목 정도만 들으면 된다. 어렵고 이론 위주인 차세대방송기술, 신호처리이론 등은 배제하고 실제 영상 촬영 및 편집을 해볼 수 있는 스튜디오실습, 영상연출론, 음향연출기법 등의 수업을 들었다. 영상연출론 수업 때는 '뷰티 아웃사이드'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학생들을 인터뷰하고 실제 성형외과 원장님을 찾아가면서 촬영을 했다. 참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자기소개서는 방송국에 제출했다.


1. 해당 직무에 지원한 동기는 무엇인가요? (① 직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② 해당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한 본인의 경쟁력을 포함하여 작성해주세요)(1500)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영상을 처음 접한 건 광주교육대학교에 공익근무요원으로 배치되었을 때입니다. 교육연구원이라는 부서에서 교수님들의 강의를 촬영하게 되었는데, 기존에 영상 담당 근로학생의 보조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영상을 배울 수 있었고, 이 친구와 뜻이 맞아 함께 팀을 꾸려 다양한 영상 공모전과 오케스트라, 수영장 외주 촬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 친구가 임용고시를 준비하게 되면서 제가 교육연구원의 영상 일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이때 다양한 고급 장비들과 편집툴을 다뤄보고 스튜디오 오퍼레이팅을 해보면서 영상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뜻깊은 2년을 보낸 뒤, 학교로 돌아와 영상을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어, 미디어 공학 부전공을 신청했고 제 주전공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공부하였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중에서 무엇을 나의 업으로 개발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고, 현실적으로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저는, 그 결정에도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부족한 전공 공부를 하거나 어학 성적, 자격증에 시간을 투자하는데, 저는 인도 여행을 가기 위해 막노동을 하였고 히말라야 트레킹 영상을 기획했습니다. 분명 제게 의미 있는 일임을 알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면 뒤처져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고, 나날이 제 청춘의 방황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공문이 하나 왔습니다. 상을 타게 되었다고.

  기계공학도인 제가 윤동주의 시집을 읽고 쓴 감상문으로 상을 준 것입니다. 이 순간 마치 그간의 방황을 모두 보상해주고 위로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잘한다고 말해주는 최초의 인정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한 번 가정해보았습니다. 내 미래는 엔지니어야. 라는 결론을 부정하고 만약 내가 PD가 된다면? 아니 PD를 꿈으로 가져본다면,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 미래는 현재의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제가 해온 모든 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한 지점이었습니다. 저의 꿈은 찾는 게 아니라 제가 걸어온 길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영상연출자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지구에 살고 있지만 서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다양한 각자의 세상이 있습니다. 저는 책, 여행, 낯선 이와의 대화를 통해 이 다양한 세상들을 탐험하고 제 세상과 충돌시켜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충돌의 파편들이 제 창작의 원천이 되고 이것을 소위 `심상`이라고 합니다. 영상을 하나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심상은 물감과 붓입니다. 저에게는 다양한 물감과 붓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껏 제가 걸어온 길이고 제 앞길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2.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을 구체화하여 실행까지 옮겼던 경험을 서술해주세요. (① 구체화와 실행의 과정, ② 결과를 통해 느낀점을 포함하여 작성해주세요)(1500)


[우공이산 프로젝트]

군복학 이후, 진로에 대해 끊임없이 방황했고 삶은 계속해서 선택지를 내밀었지만, 그 어느 선택에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대다수가 가는 길을 따라만 왔지, 제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타인과의 약속만 중요시했지, 자신과의 약속은 조금만 귀찮아도 어겨버렸습니다. 제가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원하는 결과로 만드는 과정에 대해 희망이 없었습니다. 깊은 사색 끝에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딱 하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도, 그것을 원하는 결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단순히 세뇌가 아닌,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통해 얻어진 진정한 신뢰 말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 게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일주일에 3번씩 러닝을 뛰자.


그렇게, 3년째 뛰고 있습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체질은 아니라 처음엔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하는 친구와 함께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친구와 함께 20분씩 뛰었습니다. 운동을 못 할 이유는 많았지만 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한낱 인간이기에, 한순간의 다짐이나 결심이 저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를 응원해주는 친구들과 함께한다면 그것은 쉽게 무너져서는 안 되는 큰 책임감으로 느껴집니다. 이러한 작고 꾸준한 노력이 저를 변화시켰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도 달리기를 하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순간은 하프 마라톤 완주 후 편의점에서 포카리 스웨트를 사 마실 때였습니다. 저는 행복이 눈에 보이고 단돈 2,000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 활동을 [우공이산 프로젝트]라고 명명하고 `작고 꾸준한 노력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슬로건 하에 SNS에 운동일지를 기록하며 친구들에게 이 활동을 알렸습니다. 그렇게 의견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카페를 개설하여 서로의 꾸준함 일지를 작성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를 응원해왔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을 하나의 청년 운동으로 만들고 싶어서 1,0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서울시 청년 허브 지원 사업에 신청하였습니다. 지원금이 큰 만큼 준비할 것도 많아서 제겐 일종의 도박이었지만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하지 말자, 하기로 했으면 최선을 다해서 하자며 자신에게 다짐했고 결국 1차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머릿속에만 있던 것이 점차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대의란 작고 꾸준한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지만, 그것은 성공한 실패였습니다.

  자신감이 붙어 사회적기업진흥원의 대학 동아리 지원 사업에도 도전하여 선정되었고, 이제는 이 우공이산 프로젝트를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잘 될 것 같습니다. 잘 될 때까지,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을 극복한 경험을 서술해주세요. (① 당시 상황, ② 본인의 역할 및 행동, ③ 일의 결과를 포함하여 작성해주세요)(1500)


[한겨울의 일용직 근로자]

인도여행을 가고 싶어서 토익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는 토익 시험을 잘 보면 장학금 100만 원을 줬는데 그 돈으로 경비를 충당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수중에 있는 돈으로 비행기 표를 구매하고 장학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는데, 학교 측에서 장학금 지급일이 연기되어 제가 여행을 다녀온 후에야 지급된다고 했습니다. 여행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100만 원을 마련해야 했고, 고민할 겨를도 없던 저는 생애 처음으로 인력사무소에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벽같이 일어나 사무소에 나가도 일을 구하려는 어르신들이 줄지어 계셨고, 날도 추워서 일 자체의 공급이 얼마 없었으며, 일이 있더라도 제 행색을 보고는 돌려보냈습니다. 그렇게 수차례 거절을 당하고 나서는, 최대한 두툼하고 껄렁한 복장에 군화를 신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사무소 문이 열리기 전부터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게 된 첫날 새벽, 사무소 앞에 낡은 봉고차 한 대가 도착하였고, 근로자들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차에 오르는데 그 와중에 저는 약간의 설렘을 느끼는 철없는 아기 돼지였습니다. 그 순간의 복합적인 감정을 차 안에서 기록하였고, 그 후로도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하며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틈틈이 기록했습니다. 한 번은 저희 아버지뻘 되는 분께서 딸 아이 용돈을 올려줘야 할 것 같다며 저의 한 달 용돈을 물어보셨습니다. 위험한 고층 옥상의 가장자리에서 철근을 수거하는 아주머니의 뒷모습도 보았습니다. 요령만 피우고 도박 이야기만 하는 아저씨, 정강이에 상처투성이인 팀장님, 이 모든 것이 그 어떤 책이나 영화보다도 깊은 감동을 주었고 하루 일당 이상의 가치와 의미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결국, 어떠한 경험이든 거기서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즉, 저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퇴근 후, 이 경험들을 다시 곱씹으며 블로그에 일지를 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봉고차를 타고,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한 블로그 구독자분이 제 글을 읽고 여행 경비 100만 원을 후원해주시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의심부터 했지만, 장문의 메시지를 차근차근 읽어보니 그 의도가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날의 희열을 전율 없이 떠올릴 수 없습니다. 100만 원의 후원금 때문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어쩌면 피하려고 하는 일을 마주하고, 거기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쓰인 글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한낱 일용직 근로자였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는 저 자신이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분께는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스스로 벌어보기로 했으니 후원금을 정중히 거절했고 여행을 가서 꼭 멋진 여행기를 써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100만 원을 벌어서 제일 먼저 블로그 주소가 적힌 명함을 팠고 여행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그 해는 제 생애 가장 따뜻한 겨울이었습니다.


4. 시사교양PD가 되어 우리 사회에 던지고 싶은 화두를 제시하고, 선정 배경을 구체적으로 서술해주세요.(1500)


[리턴 투 아날로그]

저는 또래 친구들과는 다르게 아날로그적 감성을 좋아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은 전인권과 김현식입니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당시 시대와 작곡가의 감정에 이입되고 미사여구 없는 가사는 은은히 가슴속에 남습니다. 또한, 세운 상가 일대를 돌며 진공관 라디오를 구매해 노래를 들었고, 휴학 기간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인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근무하며 커피를 내리고 엘피(LP)를 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것들에 끌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기다림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그것들을 애호하는 이유였습니다.


옛날엔 노래를 듣기 위해 라디오가 필요했고 그중에서도 원하는 곡을 들으려면 프로그램에 사연과 신청곡을 보내고 노래가 나올 때까지 라디오 앞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삐삐로 연락처를 남긴 뒤,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려면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가 추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엘피(LP)로 노래를 들으려면 먼지를 훔쳐낸 뒤 턴테이블에 올리고 조심스럽게 바늘을 소리골에 올려두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무언가를 기다리고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그 대상들에 그대로 스며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 이후 이 모든 것을 버튼 하나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이나 창작물 또한 SNS와 커뮤니티를 통해 쉽고 빠르게 노출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 쉽고 빨라지면서 사람들은 기다릴 줄을 모르게 됩니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처럼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그 대상을 계속 생각하고 그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지를 상기하게 되는데, 그 기다림이 없어지니 그것의 소중함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보다 세상이 삭막해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저희의 마음마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사태를 예견해볼 수도 있습니다. 현대 컴퓨터 과학자들은 소위 `마스터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바로 알고리즘을 만드는 알고리즘, 스스로 완벽히 학습할 줄 아는 기계를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줄 것이고 인류에 닥친 여러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순된 역사였고 과학 기술은 특정계층의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습니다. 즉, 인류 발전의 추진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모순된 행동이었고,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과연 이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발전이 이러한 모순점을 없애 줄 인류 최초의 전환점이 될지, 아니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될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우리는 그 점을 경계하고 우리가 걸어온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직시해야 합니다.

이전 08화 학생을 위한 나라는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