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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청년 Oct 24. 2021

자기소개서 쓰는 건 너무 어려워

What makes you move? 

[결핍 :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람]

제시문을 보고 많은 단어가 떠올랐지만, 이는 핵심 단어 하나가 없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단어를 떠올리게 한 하나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핍감`입니다. 저의 끝없는 도전과 자기 쇄신은 바로 이 결핍감에서 촉발되었습니다. 분명 가지고 있어야 하는 데 없는 것, 그래서 허전한 것, 제가 채워야 할 것은 `꿈`이었습니다.

  전공 수업으론 그것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려면 학교 밖을 나가야 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대다수가 가는 길을 따라만 왔고 주체적으로 선택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어떠한 선택이든 원하는 결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주 2회, 10km씩 뛰자.

  그렇게 3년째 뛰고 있습니다. 운동을 못 할 이유는 많지만 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작고 꾸준한 노력이 저를 변화시켰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지킬 수 있는 범위 안의 약속, 현실감 있는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신뢰를 기반으로 결핍된 꿈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것에 도전해볼 수 있었습니다.

  위 경험을 바탕으로 청년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였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여 국토종주, 히말라야 트레킹, 인도 여행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학도용 노트, 근전도 곤충 로봇을 개발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시도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건들 하나하나가 제 꿈을 가리키는 표지였습니다. 결국, 꿈이란 고민과 심사를 통해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 발자취가 수렴하는 방향, 그 끝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 방법을 공학적으로 설계하는 것, 이것이 제가 걸어온, 걸어 나가야 할 길입니다. (997)




이 자리를 빌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반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저것 한 게 많은 건 사실인데 음 네, 과장해서 적었습니다. 거룩한 신념이나 목표를 갖고 뭘 해온 게 아니고 순간순간 마음 가는 대로 했습니다. 그걸 그럴싸하게 포장한겁니다. 초밥 열두 피쓰짜리 테이크 아웃 하듯 저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다지고 뭉치고 조미료를 첨가하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알싸한 고추냉이를 묻히고, 회 한 점을 맨둥맨둥한 흰쌀밥 위에 올려놓고, 보석이라도 꺼내는 것처럼 고귀하게 내놓은 것입니다.

  입 맛에 맞지 않을까 두렵고, 소화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밥 한 줌 쥐는 것도 참 힘이 들었습니다. 밥을 짓기도 두렵고, 쌀을 씻기도, 회를 썰기도 두려운데 이 모든 과정이 초밥 한 입을 위해서라니 이토록 조신한 삶이 어딨을까요. 비록 얇게 저민 살점이라도 바닷물에 닿으면 팔딱거리는 활력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데, 이처럼 활기찬 글을 쓸 수 있는데 왜 저는 나무 도마나 작은 그릇 위에서 입맛을 맞추는 삶에, 삶의 도시락에, 성게알이나 장어구이, 꽃등심과 같이 족보 있는 친구들과 함께 꾸역꾸역 빈틈없이 메워졌는가. 


질문도 너무 어렵습니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냐고요. 저를 고민의 구렁텅이에 빠트릴 심산이었다면 정말 똑똑한 선택이십니다. 모든 취준생들이 이 문장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그저 별생각 없이 사는데 무엇이 나를 움직이냐고요? 무언가가 나를 움직이게 해야 하나요? 아, 생각났습니다.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주공 아파트에 살았던 저는 샤워를 하다가, 욕조 안에 몸을 웅크렸습니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욕조 배수구에 생긴 소용돌이가 신기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괜히 손가락을 집어넣어 보고, 소리를 들어보려 귀를 갖다 댔습니다. 물 빠지는 소리는 -끼르르루룹- 비명소리처럼 께름칙했고, 그 안은 축축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좁고 지저분하고 답답해 보였습니다. 그 구멍을 빛이 차단될 만큼 가까이 들여다봤습니다. 그 순간 욕조가 관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만 이런 경험을 해봤나요?- 팔다리를 곧게 펼 수 없어서 답답했습니다. 공포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 있을 곳은 여기구나. 엄마, 아빠, 사랑하는 친구들과 모두 떨어진 채 이 어둡고 축축하고 답답한 곳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한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나보다 더 빨리 이곳에 오셔야 하고 그 길을 내가 안내해야 하는구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고 무서웠어요. 그리고 그 공포는 제 삶의 정수리에서 폴폴 솟아나는 옹달샘이자 생명의 기운이 되었습니다.

  어린 저는 해결책을 찾아다녔습니다. 과정은 생략하고,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하나, 의사가 되어 가족 모두가 죽지 않고 살자. 두울, 종교를 믿고 영생을 얻자. 세엣,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실현할 수 있을까?

  첫 번째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교회는 열심히 다녔습니다. 성경 공부라는 것도 해보고 기도를 하면서 울어도 봤어요. 간증이라고 하나요? 머리에 골판지로 만든 왕관을 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그때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죽음이 너무 두려운 사람이기에, 천국을 가기 위해선 누구보다 높은 점수를 획득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하느님이 천국에 안 보내주면 신앙을 저버릴 거야?' 신에 대한 믿음은 너무 조건적이었습니다. 그분이 가진 능력을 시기하여 사랑하는 척하는 건 아닌지, 애초에 천국 같은 게 없었더라면 더 순수하게 믿고 사랑하지 않았을까, 신에 대한 믿음의 근본은 결국 저의 이기심이었습니다. 

  마지막 방법은 정말 달성할 수 있을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 생각을 품고 사는 것 자체가 삶에 꽤 이로운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무엇을 하면 '죽어도 괜찮을지' 찾아다녔습니다. 정말 죽어도 괜찮을만한 것이 있을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죽음과 수지가 맞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고 저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 올 한 해를 어디에 소비해야 할지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래를 위해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죽음을 피해 잘 살아왔는데 미래에는 죽음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다가 만약 내일 죽어버리면 어떡합니까. 표현이 너무 과격했나요? 순화해서, 꿈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떡하냐는 말입니다. 설사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꿈을 위해 희생한 숱한 '오늘'들 또한 제 인생인데 걔네들한테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저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책임질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오늘'들을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것들이 미래에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막상 해보니 재미가 없더라도 저의 즉흥적인 감정과 치기 어린 마음은 제가 아닌 모든 것을 만져보고 그려보고 들어 보고 맛보고 싶었습니다.

  쓰면 뱉고 달면 삼켰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쓴 맛은 죄악입니다. 대신 열심히 먹어댔습니다. 몸에 좋든 안 좋든, 비싸든 저렴하든, 똥이든 된장이든, 직접 먹어보면서 저의 입, 혀, 코, 소화를 시키는 위장 등 몸에 나타나는 신호를 관찰했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거쳐서 배설물과 영양분으로 구분되었고, 제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가 만들어졌고 좋아하는 것의 공통점, 싫어하는 것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의 공통점은 나의 일부, 삶의 한 조각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싫어하는 것의 공통점은 제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제 것과 제 것이 아닌 것, 그러니까 저와 세상, 또는 저와 당신 그 경계를 확인하는 작업을 해온 것 같네요. 저의 20대는.

  그 경계가 뭐냐고요? 그게 접니다. 그걸 어떻게 한 단어로 표현하나요. 뭐랄까, 채반 같은 겁니다. 저라는 채반으로 세상을 슥 흝어내보면 거기에 묻어서 잘 닦이지 않는 게 있어요. 저는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히 간직합니다. 아직도 계속 세상을 휘젓고 있고요. 지금 쓰는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저를 영원하게 해 줄 저작물들을 만드는 게 제 소명입니다. 원피스 보셨나요? 닥터 히루루크가 쵸파의 어리숙한 의술로 만든 독버섯 수프를 먹고 죽을 때가 되어서 말하죠. 사람이 진짜 죽을 때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라고. 같은 맥락입니다. 제가 잊혀지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계속 생각해준다면, -그것도 언젠가 끝나겠지만- 그 마음속에서라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김현식 아저씨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레 그분의 삶이 떠오릅니다. 노래가 진실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쓰는 모든 글이 진실된 자기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회사 채용팀에 제출한 자기소개서는 빼고요. 이런 글을 보내면 서류 전형을 통과하기도 어렵겠죠? 하지만 이게 제 진실된 모습입니다. 세상에 제 자신으로 남아있고 싶어서 진실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즐겁습니다.


그대는 없지만, 항상 내 마음속에 그대는 남아 있네. 

그대는 남아 있네. 그대여.


<눈 내리던 겨울밤, 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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