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일까?

by NULL
우울감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시적인 감정 상태인 반면,
우울증은 뇌와 신체의 전반적인 변화로 인해
그 기능이 저하되고 우울한 감정과 허무함,
무의미함에 지배된 상태를 일컫는다.

-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中


퇴사 삼 년 전부터 서서히 뇌기능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업무를 처리할 때 예전만큼 머리 회전이 빠르고 편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호소해도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다. 그저 일을 줄이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수준 만큼의 일처리나 집중도를 보이지 못할 뿐, 남들이 보기에는 업무 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이상하리만치 머리에 열이 오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뇌가 익고 있는 것 같았다. 뇌가 익으면 이대로 나는 죽어버리는 건가? 그런 불안감마저 생겼다.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위치에 서서 머리의 열을 식히고 있으니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지금도 가끔 그때만큼 강렬하진 않지만 뇌가 익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눈 앞이 뱅글뱅글 돌아서 모니터를 보기 힘들 때도 있었고, 민원인의 거센 항의에 평소와 달리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출근 중에 식은땀을 흘리고 서있기가 힘든 미주신경실신 직전의 증상이 나타나서 아무 역에서나 급하게 내려 벤치에 앉아 안정을 취하느라 급하게 반차를 쓰거나 아예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살면서 두통이 없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불면증과 함께 심한 두통이 이어졌고, 원인 없는 속쓰림으로 괜히 식단조절을 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멍하니 경치를 즐길 때는 내면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다가도 누군가 "오늘 날씨 좋죠?"라고 물어보면 눈물이 흘렀다. 울면서 일하는 날도 종종 있었고, 회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 갑작스레 반차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입사 후 처음으로 휴가 부족을 경험했다. 외할머니 상을 치르며 회사에서 보내온 근조화환을 볼 때면 그냥 회사를 계속 다닐까란 생각이 들다가도, 경조휴가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부터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멈추지 않아 터미널에 갈 때까지 꺽꺽대며 울다보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먹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어 부모님의 걱정을 사는 바람에 식욕촉진제까지 복용한 주제에, 이상하게도 가족과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할 때 식당을 정하는 문제로 상의하다가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그렇게 서운하고 눈물이 날 수 없었다. 한 번은 울고불고 난리를 부리고 외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나를 걱정한 아빠까지 빠지면서 온가족의 외식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일도 있었다. 그게 내가 서른여덟 살일 때 일이었다. 여덟 살이 아니라.


거의 유일했던 취미인 독서도 우울증으로 난독증이 심해지면서 몇 달간 손을 놓는 일이 수시로 발생했다. 평소에 여러 권의 책을 들고 다니며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원하는 책을 골라서 읽는 편이었는데, 세 권의 책을 동시에 펼쳐놓고 삼십 분씩 돌아가며 붙들고 읽어보려 노력해도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주말 내내 이 짓을 하다가 결국 책 읽는 걸 포기했다. 그쯤 유튜브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됐다.




퇴사만 하면 모든 게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 보통 초기우울증은 6개월 정도 병원을 다니면 완치된다는 말도 있었다.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막연하게 일 년쯤 치료를 받고 쉬고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퇴사 후 지금까지 일하기 위해 정신력으로 버텨왔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체력 회복에만 몇 달을 쏟아부어야 했다.


처음 몇 달 진료를 받았을 때 의사는 다음 달에는 약을 끊는 연습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말을 했다. 하지만 예정에 없던 조카 돌보기에 다섯 달 동안 시간을 할애하면서 우울증이 다시 급격하게 심해졌다. 몸상태가 안 좋을 때는 어차피 아무 것도 못하니 조카와 놀아주는 게 정신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차츰 회복되자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오면서 내 시간을 마음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라는 감정이 생겼다.


약을 줄이는 연습을 하다가 상태가 더 나빠져 한동안 더 많은 약을 먹고나서야 그나마 이전의 상태로 겨우 돌아오기도 했다. 이상하게 치료를 할수록 먹는 약의 종류가 늘어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상태에 맞춰서 추가 처방을 해야 하니 당연한 결과겠지.




일 년 가까이 치료 받아보니 우울증 치료는 주식차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계단식으로 차근차근 한 단계씩 좋아지는 게 아니라 기복이 그야말로 들쑥날쑥한다. 일기를 쓰다보니 본의 아니게 복약일지를 쓰고 의사에게 공유하고 있는데 한 달은 좋다가 한 달은 이유없이 나빠진다(아마 이유는 있을 것이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거나 모른 척하는 것일 뿐.). 나는 사실상 평생 이렇게 살 수도 있겠다고 체념한 상태다. 차라리 이게 정신건강에 훨씬 좋은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의 입장은 달랐다. 몇 주 전 부모님으로부터 왜 이렇게 안 낫는 거냐며 다른 병원에 가보자는 말을 들었다. 다른 병원과 달리 정신과 병원을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병원을 옮길 때마다 모든 검사와 테스트, 상담을 다시 해야 한다. 감히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경찰서에 가서 피해자 조사를 반복해서 받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내가 왜 아프게 됐는지를 복기해서 구구절절 처음부터 다시 읊어야 한다. 다니는 병원이 안 맞는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해야지."라고 부모님은 말했지만 이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는 부모님이 아니라 '나'다.


"실은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나봐요."


의기소침해 하는 나에게 의사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한달간 평균 2~4mg을 복용했던 항불안제의 양이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고 결국 일일 최대치인 10mg을 복용하는 날도 생겼다. 몇 주간 6~8mg의 항불안제를 먹으며 버티고 나니 조금씩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울증이 의심되는 분들은 쉽게는 대학병원 사이트에서 무료로 우울증 테스트를 할 수 있다. 여러 사이트에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꽤 정확도가 높은 편이었다. 병원 방문 전에 한 번쯤 확인해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몇몇 병원 사이트에서 직접 테스트를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병원에 방문하면 물론 병원마다 다르지만 정신질환과 관련된 아주 긴 설문조사를 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 설문조사지를 작성하면서도 울었다. 기계를 활용한 검사에는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의 활성화 정도를 비교할 수 있는데 건강한 사람의 경우 활성도가 균형적인데 반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가 있는 경우 불균형한 활성도를 보이게 된다. 내 기억에 나의 활성도는 3:1 정도로 격차가 심한 편이었다.


이 외에 혈압도 측정하는데 나는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말하길래 혈압은 원래 낮은 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복용약에 혈압을 올려주는 약이 추가되었다.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샤워할 때 평소보다 좀 힘들다는 느낌이 들어 무섭다.




며칠 전 우울증 환자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착시현상이라는 포스팅을 보게 됐다. 덧글란에는 '나 우울증이었구나.', '우울증이 맞았구나.', '없던 정신질환이 생겼습니다.'라는 내용이 무수히 달려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내용은 '우울증으로 치료 받고 있는 사람인데 정상인처럼 보입니다.'라는 덧글이었다. 나는 그 덧글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저도 그래요 ㅋㅋ'라는 답글을 적었다. 그 포스팅 덕에 과학을 불신하게 됐다.


우울증이 의심되면 병원에서 제공하는 테스트를 받고, 필요 시 병원을 방문해 검사 후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처럼 혼자 해결해보겠다고 장기간 방치하면 괴로움과 치료기간만 길어질 뿐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출처불명의 테스트를 하며 시간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설문조사지의 결과마저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정신과 전문의들의 견해다. 아플 땐 의사와 면담을 해야 한다. 대신 꼭 좋은 의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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