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뜨니 밤새 유튜브 영상을 돌리던 휴대폰이 배터리 소진 알람을 띄우고 있었다.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고 나니 한 시간이 지났다. 휴대폰은 그새 85% 충전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금방 충전될 수 있으면 좋겠다.’
3주간 좋은 상태를 유지했던 컨디션이 2주간 무너지면서 몸과 마음, 그리고 생활패턴은 엉망이 됐다. 가장 큰 원인은 식욕촉진제 복용 중단이었다. 두 알씩 열흘 동안 복용하도록 처방됐던 약을 한 알씩 이십 일간 먹었다. 이렇게 된 데는 처방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다른 약들도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일반적인 복용의 절반 정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특별히 문제가 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약이 더 일찍 소진되었다면 아마 다음 진료일 전에 병원을 재방문했을지도 모른다. 식욕촉진제 없이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만 먹던 첫날부터 겨우 찾은 안정이 무너질까 초조해졌다. 다행히 우려했던 식사 거부 반응은 없었지만, 진료일에 가까워질수록 식욕은 눈에 띄게 저하됐고 체력 또한 떨어졌다.
의사와 상의하여 다시 약을 처방 받았지만 복용량이 적어서인지 처음만큼의 약효는 없었다. 임의로 복용량을 늘려볼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곧 생각을 관뒀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하고 약물의존도가 심해지면 나중에 약을 끊을 때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항우울제를 처음 먹기 시작했을 때도 같은 고민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같은 선택을 했다. 어떤 약물이든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최종적인 목표가 약물을 끊은 후에도 긍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과용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식욕촉진제를 다시 복용한 지 열흘, 만족스럽지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상태에 도달했다.
비슷한 시기에 손목 통증이 생기면서 노트북 사용을 제한한 것도 심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줄곧 사무직으로 일했는데 지금까지 없던 증상이 갑자기 생기니 솔직히 황당했다. 열심히 일하는 척했지만 ‘사실 나 그다지 열심히 일했던 게 아니었던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문서 작업도 있었지만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작업이 주된 업무였기 때문에, 라고 합리화했다.
결과물 자체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글을 쭉쭉 써내려갈 수 있는 능력자가 못 되다보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레 손가락과 손목에 무리가 왔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통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방치했더니 증상이 더 악화됐다. 결국 손 여기저기에 파스를 붙였고 덕분에 통증이 크게 완화됐다. 이참에 큰 맘 먹고 손목 보호용 쿠션도 질렀다. 당분간은 조카의 그네 밀어주기도 너무 열성으로 하지 말아야겠다.
우리 마음은 매 순간 그 모습이 변합니다. 수면을 얼마나 잘 취했는지, 늘 나를 지적해대던 상사와의 사이가 어떠했는지, 배가 고픈지 혹은 부른지와 같은 그날의 여러 조건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늘, 조금씩 바뀝니다.
- <나를 살피는 기술> 中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루 종일 일해도 거뜬하고 상쾌할 줄 알았다. 물론 뿌듯한 때도 있었고, 아픈 걸 참아가며 글을 쓴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회사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기 싫은 일도 마무리 짓고 나면 결과물을 보며 뿌듯해 했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왔다.
자기 관리를 못하면 당연히 아프다. 잠을 설치면 다음날 피곤하고, 일을 많이 하면 지치기 마련이다. 회사원일 때도, 백수일 때도, 생계를 위해 일할 때도, 새로운 도전을 할 때도 불변의 진리다. 운동선수나 아이돌 가수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춤을 춘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아프지 않거나 다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그리고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든 간에 좋은 성과를 내고 싶으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건 폐차 직전의 차를 탄 레이서에게 일등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린왕자>에서 왕이 말하길, 실행 불가능한 것을 명령했을 때 명령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명령을 내린 자에게 있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명령은 내리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쉬운 길은 없다. 백수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선언하건대 백수생활도 절대 녹록치 않다. 본가에 들어와 백수가 되고나면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편안하게 요양하고 내 시간은 온전히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백수가 되고나니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는 조카를 돌봐야 했다. 학교 숙제도 봐줘야 하고, 달래서 공부도 시켜야 하고, 내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어 식욕촉진제를 먹으면서 밥투정하는 아이를 달래 끼니도 챙겨줘야 한다. 놀아달라고 보채는 혈기왕성한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 그네도 밀어줘야 하고 산책을 하고, 이따금 술래잡기를 하며 넘쳐나는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도록 놀아줘야 한다.
주양육자가 아님에도 해야 할 일이 이렇게 많다. 이것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가족과 어울려 살면서 지금까지 못했던 딸 노릇도 해야 하고, 미미하지만 집안일도 거든다. 회사 다닐 때 못지않게 바쁘다.
그래도 지금이 좋다.
생각했던 대로 매끄럽게 흘러가지도 않고 차고 넘칠 것 같던 시간이 여전히 부족하지만,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구겨진 얼굴로 다시 회사로 향했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종종 직장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로 퇴사를 고려하는 분들이 블로그를 통해 회사를 그만두면 정말 괜찮아지는지 물어오곤 한다. 내 대답은 늘 같다.
“쉬운 길은 없지만 조금 더 행복한 길은 있다.”
얼마 전 나는 본가 근처 도서관의 단기 계약직 자리에 지원했다. 나에겐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우울증으로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근무기간이 짧으니 버텨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면접 분위기도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불합격했다. 아쉽기는 해도 전입신고를 하면서 드디어 지원자격이 주어졌다는 것과 면접에 도전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해보지 못했을 도전이었다.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도전할 것이다.
우리가 지루한 학교 공부와 직장 생활을 버티는 것도, 하기 싫은 것을 꾹 참는 것도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언젠가는 삶의 즐거움이 찾아올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 <나를 살피는 기술> 中
회사에서 한 달을 버티면 월급이 나온다. 그게 끝이다. 내가 좀 더 소비지향적인 사람이었다면 회사를 다니는 게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특별히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어쩌면 우울증으로 인한 무기력이 물욕 없던 나를 더욱 그런 방향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당시 나에게 월급이란 그저 퇴사에 대비하여 비축해두어야 할 자산이었다. 퇴사하기 위해 출근했으니 당연히 회사가 재밌을 리 없었다. 월급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갈 곳, 그곳이 내 인생의 삼분의 일을 저당 잡고 있는 회사였다. 이곳에서 나는 도대체 왜 버티고 있는 걸까?
퇴사 전, 나는 회사를 나온 후 지금 버는 것만큼 벌지 못하면 영원히 밑바닥 인생을 살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고는 했다. 충분히 준비가 된 다음에 퇴사를 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나는 퇴사하고 싶다는 욕망과 퇴사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 짓눌리다 결국 회사 밖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막상 백수가 되고 나니 두려워했던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돈을 많이 쓰지도 않으면서 번다는 것에는 왜 그토록 집착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본가에 내려와 캥거루족이 되면서 각종 공과금과 생활비에서 자유로워졌다. 대부분의 활동이 집 안에서 이루어지다보니 돈 쓸 일도 그다지 없었다. 고정적으로 보험료와 병원비, 휴대폰 요금이 나가는 걸 제외하고 내가 쓰는 돈이란 가끔 외식비를 내고, 장을 보고, 편의점에서 조카에게 간식을 사주며 플렉스하는 게 전부였다. 조카가 현재까지 파악한 내 옷의 개수는 네 벌, 신발은 슬리퍼 한 켤레뿐이다.
당장 얼마간 쉰다고 해서 경제적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 일 년쯤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데 써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껏 불행하게 버티며 살아왔는데 한번쯤 내 행복을 위해 사는 호사를 누려 봐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나는 당당히 “예스!”라고 외쳤다.
대개 칭찬을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의 기준을 수직선의 정 중앙, 그러니까 ‘5’로 삼는다. 5를 넘지 못하면 칭찬보다는 ‘해내지 못한’ 일이라 여긴다. 그리고 자책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이제부터 기준으로 잡을 숫자는 ‘0’이다.
- <나를 살피는 기술> 中
지옥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도 힘들고, 그곳을 피해 재취업하는 것도 힘들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선택한 일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처음 회사를 다닐 때처럼 초반에는 재밌다가 금세 시들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옥에 계속 남아있으면 행복해질 확률은 제로다. 새로운 길을 나서면 확률은 50%로 올라간다. 이 길에서 실패한다 해도 행복해지는 길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고, 흥미가 식어버린다고 해도 새로운 즐거움에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 길을 간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생을 ‘행복한 것들’로 채우면 된다고 한다. 나 자신에게 매일 질문을 던진다. 나라는 그릇은 주어진 행복을 담을 만큼 충분히 넉넉한가? 오늘 나의 그릇에 나는 행복을 담았던가, 불행을 담았던가? 내가 선택한 행복을 조금밖에 부풀리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다그치지는 않았나?
인생은 내가 행동한 만큼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니 불행으로 방전되지 않도록 행복을 자주 충전하고, 노력을 하찮게 여기며 자신을 학대하기보단 세상 누구보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세상 모두가 나의 선택을 외면해도 나만은 나 자신의 든든한 편이 되어줘야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