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사회생활은 서른 살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몇 년간 임용시험을 준비했지만, 소수점 차이로 합격여부가 갈리는 시험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아 합격자 발표 후 곧바로 취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취업이란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 없다보니 당연히 개념도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최종면접까지 곧잘 올라갔는데 개중에는 공사 출판부, 유명 교육기업도 있었다.
얼마나 취업시장에 문외한이었냐면 면접장에서 희망연봉을 이야기할 때 지금 생각하면 신입직원 연봉으로는 어림도 없는 금액을 매우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너무 똑똑해.”
면접관의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공사 면접에서 떨어졌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의 마인드였으나, 많은 단계를 거친 교육기업 최종면접에서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취업이 장기화될 것 같아 그쯤 논술첨삭 알바를 했던 경력을 살려 논술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고, 곧이어 자기주도학습 기업의 한 지점에서 매니저로 일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투잡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투잡을 해도 괜찮다며 관대한 척하던 지점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사 일을 관둬야 되지 않겠냐고 은근히 압박해왔다.
어쩔 수 없이 욕을 먹어가며 학원 일을 관둔 후, 나에게 돌아온 건 지점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부지점장의 본격적인 갑질이었다. 학생들을 케어하고, 학부모와 학생 사이를 조율하는 일이 나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굳이 이런 부당대우를 견디며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두겠다고 말한 후 근로장학생과 조교를 했던 경력으로 대학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면접 후 출근일이 정해졌고 예정보다 빠른 퇴사에 나는 또 욕을 먹어야 했다. 퇴사할 때 욕먹는 것에 면역이 생겼다.
진정한 가치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우월한 존재가 아닌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삶에서 숫자를 지워야 할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있다.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인생에서 숫자를 지울 것 中
그렇게 들어간 회사에서 나는 네 명의 동기와 함께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각각 다른 부서에 배치되었지만, 행정 일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부서 간에 유기적인 협조가 필요했고, 우리는 서로 돕고 의지하며 힘든 회사생활을 버텨냈다. 그때 함께 일했던 동기, 그리고 같이 어울렸던 또래 직원들과는 뿔뿔이 흩어진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아직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걱정과 고민을 나누는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여자 팀장님이 다른 여자동기들에게 회사를 다니면서 더 좋은 곳에 계속 지원서를 내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한테는 그런 말 없던데?”
의아함은 팀장님의 권유 뒤에 이어진 말에서 해소되었다.
“여자나이 서른 되기 전에 계속 다닐 직장을 정해야지.”
그렇다. 그 팀장님에게 서른인 나는 여기를 무덤으로 알고 인생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조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몇 년 사이 나를 포함한 여자동기들은 약간의 텀을 두고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동기들이 결혼과 출산을 겪는 동안 나는 여전히 미혼이었고, 그 바람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여자 동기 중 커리어를 가장 오래 끌고 간 사람이 되었다. 황당한 것은 몇 년 뒤 그 팀장님 또한 다른 대학으로 이직했다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앞서 걱정하는 건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 땅굴에서 살거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장 쓰지 않을 물건을 대량 구매해 놓는 것과 같다. 삶의 낭비이자 비합리적인 일이다.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미래에 대한 엉터리 각본을 쓰지 않을 것
첫 회사를 그만둘 때, 나는 다음에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오래 전부터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좋아했고, 그 로망을 실현하기 위한 자격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퇴사하겠다는 각오만 있었다. 워낙 야근이 많은 곳이어서 이곳에 다니면서 자격과정을 이수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가까운 교육기관도 없었다.
소속팀장님은 나의 무모함에 커리어가 끊어질 것을 염려했고, 나에게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마련해주면 내가 마음을 바꿀 거라고 생각해 회사를 계속 설득했다. 앞으로 대학에서 절대 일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은 터라 그런다고 해서 내 마음이 변할 리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나가면 내가 더 이상 사회로 진입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회사는 팀장님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고, 나 또한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팀장님이 걱정했던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 후 나는 가급적 다음 커리어를 위해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자격증 소지자와 경력자가 넘치는 상황에서 좋은 기회가 나에게 올리는 만무했다. 운 좋게 서울시에서 시각장애인도서관 사업을 지원하는 작은 기관에 취업했으나, 오랫동안 그곳에서 일한 직원과 대화하며 월급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하루 만에 퇴사했다.
사회라는 정글에 잔뜩 움츠러든 나는 다시는 대학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꺾었다. 월급은 받을 수 있는 곳들을 대상으로 다시 지원서를 넣었고, 그렇게 취업한 곳에서 나는 6년 넘게 근무했다.
서른여덟 생일, 나는 회사와 휴직이냐 퇴사냐를 두고 실랑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름 뒤 나는 퇴사했다. 이번에 나올 때도 갈 곳을 정하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팔 년간의 사회 경험을 통해 조직생활이 나에게 맞지 않다고 확신했다.
나는 인간관계를 최소화하여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되기로 했다. 프리랜서로서의 토대를 갖추고 회사를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우울증은 내가 완벽하게 준비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삼 년 동안 우울증 기복으로 계획했던 것들이 뒤집어지는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나는 더욱 무기력해졌다. 회사를 다니며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동안 세상이 변해버린 걸까? 오래 전부터 내가 어떤 일들을 꿈꾸고 있었는지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잘 해낼 거라며 나의 퇴사를 격려했다. 줄곧 퇴사를 말려왔던 분들이라 그 말이 참 낯설게 다가왔다. 한편으론 정신과 의사에게 현실감각에 관해 한차례 타박을 듣고 의기소침해 있던 터라, 빈말일망정 큰 힘이 되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가기 위해선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이해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직업 선택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했을 때 견뎌야 하는 건 일의 고단함뿐 아니라,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갈 것 中
본가에 온 후 처음 한 일은 <가면산장 살인사건> 읽기였다. 사실 추리소설은 평소 내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었다. 하지만 항우울제를 먹던 초기에 발생한 난독과 무기력에는 매우 탁월한 처방전이었다. <가면산장 살인사건>을 읽은 후 나는 다음 책을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얻었고, 이후 별 무리 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책을 다시 읽게 되면서 근처 도서관 출입이 잦아졌다. 홈페이지는 거의 하루에 한 번씩 접속했고 희망도서,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었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에도 참여해 쓰레기통과 짐가방, 국화 화분 등을 받아 가족들에게 살림꾼 칭호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공지사항에 채용공고가 떴다. 회사에 다닐 때도 본가에 내려오면 이용자격도 없는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채용공고를 살피곤 했다. 당시엔 주소가 서울로 되어 있어서 지원자격이 없었지만, 지금은 전입신고도 끝난 상태였다. 다시는 조직에 속하지 않겠다는 몇 달 전 결심은 흐려지고, 도서관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오랜 로망이 스물스물 되살아났다. 이건 퇴사 후 내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로망. 나는 이 유혹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곧바로 지원서를 작성했고, 다음 날 바로 제출했다. 건강도 회복세에 있고, 근무기간도 짧으니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주 5일 근무가 부담됐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하늘은 어리석은 나를 굽어 살펴 불합격을 내렸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지 않아 일주일에 이틀만 근무하는 단기근로자를 여럿 채용하는 공고가 떴다. 이건 꼭 해야 했다. 하지만 연이은 면접에서 나의 부족한 건강미가 마이너스 요소라는 걸 깨달았다. 면접장에서도 그 사실에 얼굴을 구긴 티가 났을 것이다. 합격자 발표는 예고 없이 하루를 넘겼고, 그동안 나는 홈페이지 조회 수를 높이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합격했다. 내 커리어에 도서관 근무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아직 젊으니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이제 늦었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회사 선배들은 눈썹을 시옷 모양으로 만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같이 시옷 눈썹을 만들고 답했다.
“지금 제 나이 때도 그 이야기 하셨던 거 아시죠?”
서른여섯의 눈에는 서른여섯만 지원하지 못하는 일자리가 보이고, 마흔에게는 마흔만 못하는 자리가 보인다. 안 되는 이유를 찾기 바쁘다면 그 일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말 간절하다면 안 되는 이유 아홉 가지보다 되는 이유 한 가지를 붙들고 늘어지는 게 사람이다. 간절함은 사람을 행동하게 만든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기도만 하며, 쉽게 손아귀에 넣길 바라는 건 간절한 게 아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가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들을 위해 나는 얼마나 간절히 움직이고 있는지. 그러다보면 나의 간절함을 증명하기 위해 분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