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나는 종종 우울증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동안 내가 자주 언급했던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억지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일을 가장 적당한 때에 수행해야 ‘그래도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불가능한 일을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건강을 위해 어느 선에서는 멈출 줄 아는 게 필요하다. 내가 아무리 원해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머릿속이 먹칠이라도 한 것 마냥 멍했다. 다른 날은 온몸의 관절이 쑤셨고, 또 어떤 날에는 현실을 도피하는 듯 오랫동안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스스로에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란 걸 일깨워줘야 했다. 덕분에 욕심나는 일이 있더라도 현재 내 상태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면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 일을 목록에서 지우고 잊어버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생각은 포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포기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포기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전 사례를 토대로 중간에 예상치 못하게 상태가 나빠질 것을 고려해 일정을 여유 있게 잡았고, 기한을 맞추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기준치를 잔뜩 낮췄다. 우울증 이전에는 항상 타이트한 일정에 쫓기고, 타협이란 걸 모르던 내가 편법을 쓰고 요령을 부리게 된 것이다.
어쩌면 우울증의 진짜 원인은 비현실적으로 높은 목표에 연연한 내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즘의 나는 우울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항상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래야만 내가 원하는 걸 뭐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우울증의 또 다른 장점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나의 능력과 남은 기한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미션이 있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될 게 뻔히 보이는 일에 무리하게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었다.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도 아니고, 부족한 결과물을 들이밀어봤자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미션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잊을 만하면 여기저기서 그 미션 홍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운명처럼(사실은 그저 광고에 타깃팅된 것일 뿐) 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하고 싶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안 될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하고 싶다는 감정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도전하면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가 남는다. 어차피 아무 것도 안 하면 원래대로 제로 상태일 뿐이니 손해볼 것은 없었다.
간절함은 온 우주를 움직인다고 했다. 나는 정말 초인적인 힘으로 기한 내에 미션을 마무리했다. 그때의 나는 우울증이 완치된 사람 같았다. 물론 그 뒤로 며칠을 골골 앓긴 했지만. 아직 나에게 그렇게 간절한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위해 온힘을 쏟았다. 결과에 상관없이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욕심이라고 불렀던 것에 줄을 긋고 간절함이라고 고쳐 썼다.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식탐도 없는 내가 가족 외식 장소를 두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울고있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이었다. 오랜 생각 끝에 나는 그 이유를 찾았다. 거기에는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는 당위성을 상실한 울분이 있었다.
그때 나는 가족들에게 고급 식당에 가자고 제안했지만, 가족들은 다른 식당을 추천했다. 이유는 단지 내가 제안한 식당이 비싸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계속 다니는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다. 매일 사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쯤 사치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족에게 쓰기 위해 돈을 버는데 그 돈을 쓰지 못한다면, 나는 왜 회사를 다니는 걸까?
나의 고통과 수고스러움, 인내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럴 거면 굳이 이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었다.
나는 돈을 쓰고 싶었다. 가족에게 돈을 쓰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회사에 남아있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나의 어긋난 믿음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우울증의 최대 장점은, 역시 퇴사다.
우울증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회사에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만족하는 회사, 안정적으로 월급을 주는 회사, 명함이 있는 회사. 내게 이루고 싶은 꿈이 아무리 많았다 한들 명분 없이 모든 걸 버리고 퇴사하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우울증은 이 모든 것을 뚫고 회사를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 퇴사하려고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니냐는 말을 들어도 나는 할말이 없다.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우울증은 당연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나에게 일깨워줬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더 많은 장점과 깨달음이 있다 해도 굳이 아파가면서까지 얻어야 될 것은 없다. 퇴사 후 유일한 미련은 이렇게 되기 전에, 나에게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을 때 퇴사해야 했다는 아쉬움이었다.
치료 초기 몇 달간은 재활치료를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약을 먹고 세끼를 꼬박 챙기고, 요가와 걷기운동을 하고, 안마를 받았다. 왕복 십 분 거리를 걷는 동안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어 가족을 동반하지 않는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시간들을 지금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냈더라면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지금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해냈을 것이다. 지나고 나니 아팠던 시간의 괴로움은 잊혀지고, 흘러간 시간만 안타깝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시간이지만, 용기가 있었더라면 아프기 전에 떠나올 수 있었을 테다.
지금도 나처럼 퇴사를 향해 누군가 등을 떠밀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등 떠밀려 나오게 되더라도 너무 오래 참지 않고, 너무 아프지 않게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남들도 이만큼은 힘든 것 같다는 이유로, 이 정도는 감내해야 할 것 같다는 이유로 참지 말자. 분명 우리는 아플 때보다 건강할 때 더 나답게, 행복하게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