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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순 Nov 29. 2023

눈 내리는 날, 우리는

감자탕


핸드폰 알림에 눈 예보가 떴다. 오후쯤부터 서울 일부 지역에 눈이 온다는 소식이다. 어쩐지 아침부터 날이 차가우면서도 뭔가 묘하게 포근하더라니, 눈이 오려나보다. 이미 서울에 올해 첫눈은 내렸다고는 하지만, 나의 동선을 교묘하게 피해 갔는지 눈 구경을 제대로 못했더랬다. 아직 올해 첫눈을 못 본 셈이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눈 오는 날에는 그렇게 감자탕이 생각난다. 넓적하고 큼지막한 냄비에 살점 붙은 뼈들을 수북이 쌓고, 우거지나 부추, 들깨 가루 등 여러 부재료로 풍미를 더해 팔팔 끓여낸 감자탕. 사실 어느 정도 칼칼하고 뜨끈한 음식은 감자탕 외에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감자탕이 떠오르는지 잘 모르겠다. 근데 신기하게도 이러한 마음이 드는 건 생각보다 보편적인 일인지, 모 방송에서 실시한 앙케트 조사에서도 한국인이 눈 오는 날 가장 먹고 싶어 하는 음식 1위로 감자탕이 뽑혔단다. 이게 뭐라고 괜히 엄청난 동질감과 유대감이 든다.




울망 울망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뽀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자탕 집으로 향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나름 동네에서 소문난 감자탕 집에는 나와 같은 의식의 흐름이었을 동지들이 이미 여럿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무거운 외투를 벗고 자리에 앉아 있자니, 오래 걸리지 않아 호방한 뼈 듬뿍 쌓인 감자탕과 빠알갛게 잘 익은 깍두기가 상 위에 차려진다


감자탕. 살이 실하고 국물이 깔끔하다.


사실 가게를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군침이 양껏 돈 상태지만, 꾹 참고 양념과 온기가 냄비 전체에 고루 배이도록 한소끔 끓여주어본다. 괜스레 국자로 국물을 고루고루 끼얹어 보며, 소복이 덮여있는 부추를 살짝 옆으로 치워보니 살점이 아주 두툼하게 붙은 뼈대가 여럿 든 게 보인다. 그 뼈 밑으로는 우거지 한 겹이 곱게 깔려있다. 감자가 들어가지 않아 국자로 이리저리 휘저어도 국물이 탁해지지 않고 깔끔함이 유지되어 좋다.
 
보글보글 얼추 끓고 나면 큼직한  뼈대 하나 집어 냉큼 앞접시로 가져와본다. 살이 제법 많이 붙었고, 초벌 삶기를 충분히 했는지 젓가락만 갖다 대도 살점이 손쉽게 분리된다. 손쉽게 떼어낸 두툼한 살코기를 겨자와 간장 소스에 푹 찍어 한 입에 가득 넣는다. 너무 맵지 않고 깔끔하면서도 국물 전체에 구수한 우거지 향이 배어있어 흰쌀밥이 절로 생각나지만, 볶음밥을 위해 일단은 꾹 참아보기로 다.

그렇게 뼈 하나를 해치우고 국물 한 술을 떠보면, 냄비 위를 지키고 있던 뼈에서 끊임없이 깊은 맛이 우러남과 동시에 적당히 졸아들어 국물이 한층 더 진해져 있었다. 여기에 시원하게 잘 익은 깍두기마저 자꾸 부추겨대니, 도저히 안되겠다. 말끔히 굴복하고 눈송이처럼 새하얀 공깃밥을 기어이 주문.

물론 그렇다고 볶음밥을 포기할 순 없으니, 결국 남는 결론은 과식뿐. 하지만 밥과 부추, 김가루, 계란 하나 톡 깨트려 꾹꾹 눌러가며 볶아낸 볶음밥에는 이 한 냄비의 엑기스가 집약되니, 응당 감내할만한 희생이란 생각이 든다. 배부르다며 야금야금 바닥을 긁어보지만 결국에는 모든 걸 먹어치우게 되리라는 걸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무리 배불러도 포기할 수 없는 한국인의 디저트, 볶음밥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샌가부터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 첫 눈이다. 제법 큰 눈송이가 저마다의 겉옷 위로 소복이 쌓이는 모습에 괜히 아이처럼 신나는 마음이 드는 걸 억누르기 힘들다.






눈이 오면 왜 마음 설레는지.

또 왜 그렇게 감자탕이 먹고 싶어 지는지.

감자탕으로 배가 잔뜩 부르면서 왜 또 볶음밥은 포기 못하겠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근데, 아마 다들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내년에도 눈 내리는 날이면 여지없이 같은 생각을 하고, 종종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눈 내리는 날이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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