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에 맛 들려가기 시작할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게 된다. 가보고 싶었던 유럽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한국인을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람에게 치이던 시기'였다. 한 마디로 사람에게서 도망치듯 떠난 여행.
햇살 좋고, 사람 없고, 풍경 좋다.
카메라와 나만 있으니,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다. 기대만큼의 화려함은 없더라도, 생소한 배경을 조용하게 느끼니 여유가 스며든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유롭고 예쁘기만 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 그런데..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말을 건다, 그것도 한국말로. 찰나에 여러 생각이 든다. '공항에서 봤던 북한 장교는 아니겠지?', '호객 행위인가?'
"저기요.."
".... 네?"
뒤돌아보니 깔끔하게 생긴 내 또래 남자가 혼자 서있었다.
"한국분 맞죠?
아니라고 하기에는 늦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대략 '심란한 일이 있어서 갑자기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거'라 했다.
"혹시 호텔 예약하셨어요?"
"네, 저기 아스토리아?라는 곳에 예약했어요."
급하게 오느라 호텔도 예약 못했으니, 자기도 거기 가서 묵겠다고 한다. 알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생각이 많았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찌질이기 때문. 외국 가면 한국사람 조심하라는 말을 너무 많이 봤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내 직감은 '나쁘지 않은 사람' 쪽에 바늘을 올리고 있어서 같이 가자고 했다.
호텔까지 1킬로 정도. 캐리어는 무겁고, 오르막길은 계속.. 100미터쯤 가다가 결국 섰다. (예쁜 여자들 쳐다보느라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러다 이 친구가 택시를 부르자고 한다. 갑자기 지나가던 엔젤과 베컴을 붙잡더니,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한다. 다행히 도를 아십니까가 러시아까지 침투하지는 못해서인지, 흔쾌히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한다.
두 사람은 얼굴도 너무 잘생기고 예쁜데 친절하기까지 했다. 고마운데 완벽해 보여 은근히 짜증 났다. 두 사람은 택시만 찾는 게 아니라, 우리 면전에서 쪽쪽거리며 애정행각을 했다. 짜증이 몇 배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택시를 불렀고, 우리는 너무 고맙다며 잊지 않겠다고 인사했다.
5분 정도 후에 도착한 아스토리아라는 호텔. 깔끔한 비즈니스 느낌의 호텔이었다. 방은 좁지만 이미 일본 여행에서 익숙해진 사이즈라서 나쁘지 않았다.
둘이서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는다. 알고 보니 고향도 같고 나이도 한 살 차이 나는 친구였다. 말도 꽤 잘 통했다.
사실 이때 난 사진에 미쳐있었고, 둘이서 여행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까지 사진만 찍다가 뻗어져 자는 게 여행 루틴이었다. 그래도 말이 통하니 싫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광지라 할만한 게 많지도 없고, 혼자 보다는 둘이 낫다 싶었다.
10분 정도 소화를 시키다가 우리는 이 도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밤이 심심해도 상상 이상이다. 나는 반쯤 포기하고 있는데 동생이 핸드폰을 만지더니,
"형님 클럽 가실래요?"
"응? 아, 어, 응 그래"
클럽은 가본 적도 적고 일본에서만 몇 번 간 게 전부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그거라도 해야겠다 싶어 OK를 했다. 잠시 후 우리는 본격 클럽 투어를 시작하게 된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친구는 교환학생들을 상담해 주는 일도 했었고, 여행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고수였다. 여행 경험도 많고 영어로 잘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전반적 클럽 분위기다. 재미있는 건 이런 클럽이 낮에는 식당이라는 점. 그러다가 밤이 되면 테이블을 치우고 클럽으로 변신하는 곳이 많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는 여름이었고, 또 백야였다. 저녁 10시가 돼야 해가 떨어지기 때문에 8~9시까지 밥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갈만한 데가 많지 않아서 오후에는 여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역사적 방향성 때문이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유럽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공산주의 잔재의 분위기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래도 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배경을 찍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 성당, 포크롭스키 성당 앞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다. 사진도 찍어야 했기에 겸사겸사 앉았다. 저 건물을 보니 이제 제대로 유럽 온 기분이 난다.
사진에 보이는 관광지가 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아르바트 거리, 독수리 전망대, 해양공원, 중앙광장 등이다. 그 외에 루스키 섬이라든지 꽤 괜찮아 보이는 곳도 있지만, 교통편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
도를 넘은 장난질로 심장 멎을 뻔
전날 클럽에서 만난 또 다른 커플과 술 약속이 있었다. 동생에게 먼저 가있으라고 하고 나는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 삼각대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다시 또 한 번 여긴 생각보다 심각했다. 낮은 그렇다 쳐도 밤이 되면 너무 어둡다. 심지어 어떤 골목은 바로 앞도 안 보이는 곳도 많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어떤 취객이 말을 걸며 다가오더니 몇 분이고 놔주지 않았다. 겨우 뿌리치긴 했지만 조금씩 무서워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만나기로 한 술집 앞에서 야경을 찍기로 한다. 삼각대를 놓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갑자기 '번쩍'거리는 불빛이 눈으로 들어왔다. 초점을 찾고 정신 차려 보니 가슴에 빨간 레이저가 왔다 갔다 한다. 저격 총에서 나오는 그 레이저가 맞다.
순간 뇌는 멈추고, 주변에 숨을 곳이 있나 없나 그 생각밖에 없었다. 어디서 온 불빛인가 싶어 지켜보니 100미터 정도 앞에서 SUV가 다가왔다. 그 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앞을 지나간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고 심장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다 접고 일행들과 만났다. 러시아 여자분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그냥 그거 아이들이 장난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는 것이다.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
2012 APEC 정상 회담장소였던 극동연방대학교와 잠수함 박물관 등을 돌아봤지만, 4박 5일간 사실상 클럽투어만 하다 왔다. 도망치듯 떠난 도시에서 사람을 얻어서 돌아온 첫 번째 여행이었다.
이때 만난 사람들은 연락을 하지 않지만, 혼자 하는 여행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불모지였던 이때의 블라디보스토크 역 앞에서 한국인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여행지 순위를 매기자면 당연 하위권이겠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온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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