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된 큰 아이는 요즘 김치를 먹기 시작했다. 물에 헹궈서 하얀 속살이 보이면 그걸 좋다고 먹는다. 큰 아이를 가졌을 때 김치가 너무 당겨서 김치찜, 김치찌개, 김치볶음밥을 찾아다니며 먹었었다. 그래서 아이도 김치를 좋아하는 걸까? 이유는 몰라도 야채를 잘 먹지 않는 아이가 그나마 김치라도 먹어주니 참 다행이다 싶다.
김치를 물에 헹굴 때 조금 덜 맵고 덜 짜라고 김치의 줄기 부분을 주로 줬었다. 그러다 어제는 잎 부분을 주게 되었는데 아이가 대뜸 이렇게 말한다.
"엄마~ 초록색을 주면 어떡해요. 나는 하얀 김치만 좋단 말이에요!"
"하얀색은 줄기고 초록색은 잎이야. 잎은 싫어? "
"네!! 저는 하얀색만 좋으니 하얀색만 주세요.!! "
30여 년쯤 전의 나도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엄마, 엄마는 김치 몸통이 좋아? 끝이 좋아?"
"글쎄~ 엄마는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
"엄마 나는 김치 몸통이 너무 맛있어. 나는 김치 몸통만 좋아."
나는 그렇게 김치통에서 몸통만 쏙쏙 골라먹었고 잔뜩 남은 잎 부분은 볶음밥이나 찌개를 해 먹었던 것 같다. 이제야 문득 보였다. 김치의 줄기 부분을 남겨두고 잎만 먹던 엄마의 모습이 말이다. 나 역시 아이가 먹기 좋을만한 크기나 질감의 줄기 부분은 아이를 위해 남겨놓고 있었다. 혼자 밥을 먹을 때도 말이다.
엄마란... 이렇게 티 나지 않는 것에서도 사랑을 채워가는 그런 존재였다.
내가 엄마가 되어야만 알게 되는 사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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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언니가 태어났을 때는 온 집안이 축복을 해 주었지만, 1년 뒤 내가 태어났을 땐 그렇지 못했다. 만삭 때까지 아들인 줄 알고 있다가 딸이 태어나서 모두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거기에 10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나는 어딘가 생김새도 엉성해 이쁘기만 했던 언니와는 많이 비교가 된 모양이었다. 같이 살고 있었던 할머니는 어린 나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고 언니만 안고 업고 했단다.
언니 이름은 유명한 절에 가서 그 당시 돈으로 5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지어 오고, 내 이름은 아무도 지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아 엄마가 혼자 근처 철학관에 가서 지으셨단다.
내가 6살이 되던 해에, 언니와 나는 잠시 할머니와 함께 고모가 있는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에게는 늘 언니가 먼저였다. 할머니는 생선을 구우면 몸통은 언니 밥그릇에, 꼬리는 내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과자를 여러 개 사 오셨을 땐 언니에게 항상 먼저 고르라 하셨다.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대들면 혼이 났고, 언니는 내가 얄미울 때면 쪼르르 할머니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하곤 했다.
그땐 그게 불공평하니 어쩌니 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도 언니는 만원 동생은 오천 원 받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냥 그럴 때면 잠시 언니가 미웠다가 그냥 또 같이 재밌게 노는 하루들을 보냈다. 한 살 터울 자매는 그렇게 같은 환경에서 다른 조건으로 자라났다.
2년 뒤 다시 엄마와 살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할머니는 이랬는데~.'라는 말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언니만 이뻐한 것이, 할머니에게 내가 구박을 받은 것이 자기 탓 인양 미안해했다.
거기에 언니는 돌사진이 있고 나는 돌사진이 없었다. 온 가족이 모여 수북이 음식을 쌓아놓고 찍은 돌사진이 왜 나는 없냐며, 나는 정말 주워온 것이냐고 엉엉 울어대던 사춘기의 나에게 엄마는 어쩔 줄 몰라하며 네가 사진만 찍으면 울어서 그랬다는 궁색한 핑계를 대곤 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할머니는 치매로 앓으시는 와중에도 다 자란 언니는 알아보고 나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였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에도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방문에서 언니 손은 꼭 잡은 채 나에게 존댓말을 쓰며 어디서 오셨냐던 할머니가 측은했지만, 나 역시 큰 정은 없었나 보다.
할머니에게 둘째인 나는 정말 무엇이었을까? 가끔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어린 나는 생선을 싫어했다. 고기도 싫어했다. 그 덕에 어릴 때부터 그런 건 언니만 먹었었다. 언니는 늘 표준체형이었고 나는 늘 미달이었다. 반에서 5번째로 작은 아이 정도로 오래도록 지냈다. 나중에는 언니보다 더 커졌지만 말이다. 엄마는 그런 내가 안쓰러워 밥숟갈 위에 늘 고기나 생선을 올려주셨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 집엘 내려가면 엄마는 내 밥그릇 위에 생선을 발라 올려주셨다. 엄마손에는 늘 생선 기름이 가득했다. 그만 주고 먹으라고 내가 알아서 먹는다고 투덜거렸던 게 못내 죄송하다. 그냥 우리 엄마가 최고네, 엄마가 주니까 역시 제일 맛있어!라고 해 드렸어야 했는데 말이다.
나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는 생선장사를 하셨다 했다. 그래서인지 명절에 외할머니 댁엘 가면 종류별로 맛있는 생선이 참 많았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외할머니가 구워서 발라주는 생선은 유독 맛있었다.
외할머니 집에서 만큼은 엄마의 손에 생선 기름이 묻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그 주름 많고 투박한 손으로 생선을 모조리 발라 우리들 앞에 쌓아주셨으니까. 엄마 역시 외할머니에게 엄마 그만하고 드시라고 말하곤 했었다.
외할머니 집엔 김치도 참 맛이 있었다. 우리가 가면 할머니는 김치를 세로로 얇게 찢어서 내어놓으셨다. 비닐장갑도 끼지 않은 채 손톱에 고춧가루를 잔뜩 끼워가며 말이다. 김치를 좋아하던 나는 외할머니 집에서는 김치만 가지고 밥 두 그릇도 먹었었다. 이젠 맛볼 수 없는 외할머니의 김치 맛이 그립다. 엄마도 아마 그렇겠지.
어쩌면 엄마에게도 생선과 김치는 서글픈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생선을 발라주는 엄마의 모습이 엄마의 엄마를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젠 이 세상에 없는 엄마의 엄마를 말이다.
요즘의 나는 내 아이에게 고기의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찾아 올려주고, 생선도 뼈를 골라내고 살만 올려준다.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이에게 처음 생선을 주던 날, 살은 아이에게 다 주고 껍질과 꼬리, 지느러미 부분에 붙은 살을 발라먹는 나에게 늘 생선 껍질과 꼬리와 머리가 더 맛있는 거라며 먹던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여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었다.
아이가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고 나니, 늘 우리에게 맛있는 걸 양보하던 엄마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 엄마에게 밥 한번 제대로 차려주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남의 아들 그리고 내 새끼들 밥을 차리느라 하루를 다 보내는 게 너무 미안하기도 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참 싫은데, 절로 그리 되고 마는 것이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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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를 잘라 그릇에 담을 때 줄기 부분은 작게 잘라 둔다. 아이에게 헹궈서 주기 쉽게 말이다.
아이가 자라고 나면 김치의 줄기도, 생선의 몸통도 다 내 몫이 될 테니 그 전엔 아이에게 양보해주어야겠다.
내 아이들이 자랐을 때 김치나 생선에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돌려받으려고 주는 사랑이 아니기에 괜찮다. 수많은 부모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기만 하면서 매일을 살아갈 뿐이다. 그저 내 아이가 행복하고 즐거운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는 그런 삶 말이다.
내년에는 내 아이들을 모두 두고 엄마와 언니와 함께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아직 강원도도 한번 못 가본 부산 촌뜨기 엄마를 모시고 동쪽의 넓은 바다를 보여드릴까 한다. 여행을 떠나 김치와 생선을 먹게 된다면 엄마에게 꼭 이야기해 주어야겠다. 엄마가 발라준 생선과 김치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노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