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아직 멀쩡해! 20년도 넘은 것 같은데, 이 차 얼마나 좋다고! 아무도 안 훔쳐가!! "
그러고 씩 웃으며 운전대를 돌리는 L이다. 그의 넉살에 내 마음도 푸근해진다. 선팅이 하나도 안된 유리창으로 넘어 들어오는 햇살이 조금 따갑다.
낯선 동네, 처음 와 본 리스본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기분이 묘하다. 그리고 든든하다.
리스본은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그리고 L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이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리스본의 역사를 이야기해줬고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줬다. 그가 살아온 바쁜 삶을 말이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오늘 리스본에서 하루를 묵을 수도 있고, (그의 여자친구 아버지의 으리으리한 집이 비어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 오늘 그의 집인 에보라라는 도시로 넘어가도 된다고 한다. 리스본을 둘러보는 것도 좋긴 했지만 사실 난 휴식이 필요했기에, 그리고 내 다리는 걸어 다니며 관광하기엔 아직 버거운 상태였기에 그냥 넘어가면 좋겠다고 대답한다.
시내를 조금 돌아다니고, 그의 옛 단골집에 들러 가볍게 요기를 하고, 해안가 카페에 앉아 커피도 한 잔 마신다. 푸른 하늘과 하얀 건물들, 그 사이로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너무도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해낸다.
리스본, 참 아름다운 도시였구나.
그가 떠나고 난 뒤의 나의 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길에서 겪은 신비한 일들,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이 함께 만났던 길 위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그 메일들의 타이밍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리의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게 만들어 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그저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났을 뿐이다.
그 길 위에서 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 세상에 감사한다. 나를 지구 반대편에 있게 함에도.
해가 지기 전에 우리는 리스본을 나섰다. 그의 집까지는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리스본을 떠나기 위해 긴 다리를 건너고 나니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여행지의 낯섦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다.
점점 시골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주변에 나무들이 가득하다. 낯선 나무의 줄기에는 커다랗게 숫자가 쓰여 있었다. 1이 적힌 나무들은 1 끼리 모여있고, 2가 적힌 나무들은 2 끼리, 3은 또 3 끼리 모여있었다.
"나무들에 숫자가 왜 적혀있는 거야?"
"아 저건 코르크나문데, 코르크를 한번 벗기고 나서 다시 자라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체크하려는 거야.
올해 코르크 껍질을 벗긴 나무들은 1, 작년에 했던 나무들은 2, 이런 식으로 적어놓는 거야."
"아 정말? 코르크나무가 저렇게 생겼구나. 나 처음 봐. "
"응, 포르투갈이 코르크가 유명해. 특히 내가 사는 에보라는 코르크 특산 지야."
코르크가 나무껍질이라는 것,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지만 사실 한 번도 의문조차 가져보지 않았던 것 같다. 코르크가 나무에서 나는 건지, 땅에서 나는 것지 고민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탓 이리. 코르크나무를 실제로 보고 나니 새삼스레 와인 뚜껑들이, 코르크 샌들이, 코르크 칠판이 떠오른다. 코르크 나무라니.
펄프도 안 나고 코르크도 안 나는, 나무를 대부분 수입하는 나라에서 살아왔음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그리고 세상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것들과 그것들을 존재하게 한 그 엄청난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아! 이 세상은 얼마나 거대하고 아름다운가!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한적한 도로는 깜깜해졌다.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에만 의지해야 하는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길이다.
"도로가 왜 이렇게 어두워?"
"밤이니까 당연히 어두워야지."
"근데 가로등 같은 거 보통 있잖아. 너무 어두운 것 같아."
"불을 계속 켜놓을 순 없잖아. 전기 낭비고 동물들도 괴로워. 그리고 별도 안보일걸? 운전만 조심히 하면 돼."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 이후,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자기 나라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모두 없애버렸다. 이탈리아가 그러했고, 포르투갈이 그러했다. 그네들은 밤에는 필요한 불만 사용했고, 에어컨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게 맞는 것 같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워야 한다. 그게 자연의 이치고 삶의 섭리이다. 나 하나 조금 시원하자고 얼마나 많은 자원을 낭비하고 지구를 아프게 하고 있는가? 24시간 불이 켜져 있고, 24시간 냉방/온방이 풀가동되는 나라에서 온 내게는 조금 색다른 충격이었다.
한참을 달려 조그만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러 장을 보았다. 슈퍼마켓은 어느 나라에서든 가장 즐거운 곳이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그 슈퍼마켓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배드 버그에 두 번이나 물린 나를 위해 L이 비타민과 칼슘을 사 든다.
"여기 있는 동안 몸을 회복시켜야 하니까 잘 챙겨 먹어야 해."
그의 사소한 챙김이 고맙다.
"오브리가도~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표현을 각 나라별 언어로 익혀놓으면 여러모로 참 유용하다.
그라시아스(스페인), 그라찌에(이탈리아), 오브리가도(포르투갈), 메르씨(프랑스),
당케 쉔(독일), 아리까도 고자이마스(일본), 쒜쒜(중국), 살라맛(필리핀).. 요정도?
사실 여행 중 고맙다는 인사만 잘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적절하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줄 안다는 것, 세상을 조금 쉽게 살아가게 해 주는 가장 유용한 팁이 아닌가 싶다.
장을 본 L이 나에게 다시 묻는다.
"자, 우리 집으로 갈 수도 있도 내 친구 집으로 갈 수도 있어. 내가 얘기하긴 했겠지만 우리 집은 조금 불편하고 밤에 들어가면 무서울 수도 있어서... 친구 집은 아마 크고 깨끗하고 네가 지내기 불편함이 없을 거야. 어느 집으로 갈까? "
사실 전기도, 물도 없다는 L의 공간이 궁금했지만, 이렇게 까지 얘기하는 L을 보니 다소 걱정이 된다. 정말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집이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친구의 집을 선택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당연히 너희 집으로 가야지. 궁금해. 얼른가 보자. "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가자."
그의 집은 슈퍼마켓에서도 30분은 더 가서야 나왔다. 리스본에서부터 세 시간 정도 걸렸다. 정말 가깝다는 듯이, 나를 배웅하러 나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L이었는데, 이 고물차로 리스본까지 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의 친절이, 그 큰 배려가 고맙다.
마을을 벗어나고 길은 다시 어두워졌다. 양 길 옆으로는 나무들이 가득했고,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적당히 서늘하고 약간 건조한듯한 포르투갈의 밤공기가 맘에 든다. 창문을 내리고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포장된 도로를 달리던 L의 낡은 차가 갑자기 왼쪽으로 이어진 낡은 흙길로 접어든다. 바닥은 듬성듬성 이어진 철길로 되어 있었다. 양들이 이 길을 건너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길이라고 했다.
'이런 곳에 집이 있다고???'
아무리 봐도 양들만 다닐 법한 광활한 들판의 샛길로 L의 차가 들어섰다. 친구네 집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은 것이 조금 후회된다. 집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어두운 숲 속으로 계속 들어가기만 한다.
양들이 길을 걷다가 헤드라이트 불빛에 길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창고 같은 건물 두 개가 나란히 나타났다. 정말 상상 그 이상이다. 양 떼와 코르크나무로 둘러싸인 언덕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집 두 개.
그리고 하늘 위로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다.
많이 낯설다. 또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다.
차를 대충 아무렇게나 세우고(주차라인이 없으니까) 슈퍼마켓에서 사 온 짐꾸러미를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양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나무로 대충 만들어놓은 대문을 밀고서 말이다.
"넌 여기서 지내면 돼. 내 여자친구가 지내던 공간인데, 네가 지내기 불편함이 없을 거야."
여자친구와 함께 이 곳에 집을 마련한 L은 지금 이 곳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 아니 옛 여자친구는 리스본에서 살면서 한 번씩 이 곳에 놀러 온다고 했다. 이 곳의 지루한 삶을 버티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런 삶을 버틸 수 있는 여자는 몇 안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짐 풀고 내 집으로 넘어와!"
"응!"
내 방에 초를 몇 개 켜 주고 그는 그의 공간으로 넘어갔다. 건축과 인테리어를 전공한 그의 옛 여자친구의 세심한 손길들이 느껴지는 집이다. 텅 빈 공간을 하나하나 채워가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을까?
낯설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던 그들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듯 해 미소가 절로 뗘진다.
코르크로 만든 바람막이, 조그만 티라이트 껍질로 만든 샹들리에,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누군가의 정성이 가득해 보이는 이 공간이 나는 몹시 마음에 든다.
짐을 풀고 L의 공간으로 넘어갔다. 그의 공간은 나의 그것보다 조금 더 넓었다. 태양광 발전기로 충전시킨 건전지로 작동하는 손전등을 들고서 그는 나를 이곳저곳으로 안내했다. 아기자기하고 깔끔하다. 이렇게 만들라고 해도 나는 절대 못할 것 같은 모습이다. 주방은 주방 같고, 서재는 서재 같고, 침실은 침실 같았다. 제각각 제 용도에 맞게 잘 꾸며져 있었다.
"와우,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훌륭해! 집 정말 잘 꾸몄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이었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정갈한 그 느낌이 L과 어울린다 생각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조금 전에 사 온 빵을 조금 먹었다. 버터크림, 딸기잼, 치즈, 햄 등을 올려서 즉석에서 만들어 먹는 샌드위치다. 빵이 주식인 이 나라에서는 빵이 참 맛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호밀빵인데 어쩜 이렇게 맛이 있는지!
두 달 정도 빵을 주로 먹으면서 지내왔지만 포르투갈에서 먹는 빵이 제일 맛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빵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있기만 한 걸 보면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L이 화장실로 나를 안내했다. 집 앞마당 위로 펼쳐진 은하수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해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마침내 화장실이라 불리는 곳에 갔을 때, 나는 또 빵 터지고 말았다.
이건... 정말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일단 요는 그렇다.
작은 볼일은 아무 곳에서나 본다. (양들만 잘 피해서 보면 될 것 같다.)
큰 볼일은 L이 만들어놓은 수제 화장실에서 보면 되는데, 일단 일반 양변기 모양 커버 위에 앉아 볼일을 보고 옆에 있는 숯가루로 살짝 덮는다.(숯은 냄새 및 벌레를 퇴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큰 볼일용 통이 다 차면 L이 알아서 처리를 한다고 하니...(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땅에 묻는다고 한다) 난 그저 볼일만 보고 깔끔히 덮어놓기만 하면 됐다. 샤워실과 세면대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단 물은 수동으로 부어서 사용해야 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빗물을 받아 샤워를 하기 때문에 자주 씻진 못하겠지만, 일단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L이 받아놓은 물을 부어 대충 세수를 하고 양치질도 했다.
이 새롭기만 경험이 우스워 계속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바로 내 머리 위로 펼쳐져 있는 은하수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세상에 이런 천국이 또 있을까 싶기도 했다.
L과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나는 내게 주어진 공간으로 향했다. 하늘에서 눈을 떼기가 정말 어렵다. 별들이 반짝이고 바람이 춤추고 양들이 노래하는 여유롭고 아름다우며 평화로운 밤이다.
낯선 침대에 누워 내게 펼쳐졌던, 내가 지나왔던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이 낯설고 차분한 공간에서 나는 편안하게 푹 잠들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의 집, 내 집은 아니었지만 여느 여행지들의 낯선 숙소들과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누가 불쑥 나타나지도, 갑작스레 낯설고 커다란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편안하고 차분한 개인의 공간. 60여 일을 넘게 낯선 곳을 떠돌아다니던 내가 너무도 원했던 공간이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음이 참 감사하다.
다음날, L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어제와 같은 빵과 커피, 그리고 야간의 과일을 곁들인다. 빵도 맛있고 커피도 맛있다. 치즈는 여전히 내 입맛에 잘 안 맞지만 치즈를 좋아하는 L이 종류별로 사놓은 치즈 중에 그래도 입에 맞는 치즈가 있어 다행이었다. 올리브유는 또 어찌나 맛있는지! 올리브 공장에서 바로 짜서 왔다고 하는 올리브유는 한국에서 먹던 그 맛과 완전히 달랐다. 역시 무엇이든 원산지에서 먹는 것이 최고인가 보다.
아침을 먹은 뒤 L은 일을 하러 나갔다. 그는 근처에 있는 아트레지던스에서 잡일을 도와주고 약간의 보수를 받는다고 한다. 보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가 먹고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우리가 먹고사는데 드는 비용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고 늘 말하던 L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가 말하는 의미가 제대로 와 닿았는다.
정말 삶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내 몸이 쉴 수 있는 공간과 내가 먹을 수 있는 약간의 음식, 그 정도면 충분한걸.
물론 집이 좋아야 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이렇게 가다 보면 끝도 없이 많은 것을 가져야 하지만 그 욕심들을 내려놓은 최소한의 삶을 생각해 본다면, 사실 내게도 필요한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욕심내고 살아왔었는가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곳에 머무는 시간은 거의 비슷하게 흘러갔다. L은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일을 했고, 나는 혼자 설거지를 하고 책을 보고 명상을 했다. L이 돌아오면 함께 점심을 먹고 각자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있을 때는 시내로 나가 콘서트도 보고, 이웃에 있는 아트레지던스에 놀러 가 셰어 디너로 음식을 나눠먹고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예술가들과 재밌는 대화를 나눴다. 주로 네덜란드에서 온 그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예술과는 거리가 먼 공대생이었던 나에게는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들에게는 예술의 ㅇ도 모르는 한국에서 온 조그만 내가 더 신기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시내에 나가 맛있는 스테이크, 생선요리를 먹기도 했고 싸구려 하우스 와인을 먹고 숙취로 고생도 했다. 주말마다 열리는 시장 구경도 했고, L 친구의 으리으리한 저택에 가서 인터넷도 하고 수영도 했다.
L의 집에 자주 놀러 오는 그의 친구와 L이 여유롭게 뭔가를 피워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치즈가게를 하는 L의 친구 집에 놀러 가 새로 만든 양의 치즈, 소의 치즈, 염소의 치즈 맛을 비교해보기도 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언덕을 양들과 함께 걸어 올라가기도 하고, 폐허가 된 오래된 옛 기차역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지기도 했다.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성으로 올라가 아름다운 주황빛 야경을 바라보고 기적을 불러온 여왕님의 동상 앞에 앉아 밤바람을 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가장 즐거운 건 그래도 슈퍼마켓에 가는 시간이었다. 새로운 맛의 잼을 사서 발라 먹어보고 새로운 종류의 빵을 사서 먹어보는 것, 그 삶에서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변화 중 하나를 만들어 주는 공간이 바로 그곳이었다. 검소함이 몸에 밴 L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슈퍼마켓의 음식들이었기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다양한 것들을 사 보려 늘 애를 썼다. (숙박비 대신 슈퍼마켓 비용을 내가 대기로 했었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이 되면, 앞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던 별자리들을 찾는 재미에 푹 빠졌다.
갤럭시와 안드로메다를 눈으로 찾았을 때의 감동이란!
L의 공간은 새로웠고 평화로웠고 편안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러가는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는 날이 늘어날수록, 하루하루 줄어드는 나의 여행 달력의 남은 날들이 어쩐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원래 계획했던 스페인의 남쪽을 가지 못해서 느끼는 답답함은 아니었다. 혼자 하는 낯선 곳의 여행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그저 L의 공간을 들여다보고 L의 삶을 함께 즐겨보고 나니 다른 누군가의 삶도 궁금해졌을 뿐이다.
내가 이 지구 반대편에 또 언제 오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나의 이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만 보내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나를 점점 더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의식 중에 쌓여가는 나의 불안감이 나를 점점 예민해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늦은 밤 함께 나누던 대화에 약간의 의견 충돌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건 너의 삶, 이건 나의 삶이라는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뭐든 가르치려 하고 알려주려 하는 L의 의견에 나는 쉽게 공감할 수 없었고, 그의 의견과 반대되는 나의 의견을 이야기하다 보면 어쩐지 L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에게 나는 어리고 버릇없는 친구였을 뿐일 듯하다.
나에게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의 삶에 들어오게 한 L에게 나는 대체 어떤 존재였던 걸까?
세상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 돌려받기를 바라고 호의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L처럼, 그리고 내가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처럼 바라는 것 없이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존재한다.
무엇인가 돌려줘야 한다 부담 갖는 것은 지금껏 그런 삶을 살아온 나의 습관적 강박일 뿐이다.
L은, 나의 좋은 친구이자 스승인 L, 자신을 연금술사라 얘기하던 그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넓은 마음의 L은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보는 법을 알려 주었다.
내가 그에게서 받은 그 큰 사랑, 아니 세상으로 받은 그 큰 사랑을 나는 다시 세상으로 돌려줄 것이다.
나 역시 세상을 위해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나눌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바라는 것 없이, 세상이 지금껏 내게 준 것을 다 갚기엔 내가 베푸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집을 떠나기 전 그의 앞마당에 오렌지 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나중에 언젠가는 내가 이 곳에 다시 와서 오렌지 장사를 하며 지내겠노라 그에게 약속하고선, 내가 좋아하던 그 올리브 오일과 달콤한 꿀을 양손 가득 들고, 엄마같이 포근한 그의 마음을 안은채 에보라를 떠났다.
떠나기 전, L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나의 운명의 한 사람이 존재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게 될 때가 있어.
내가 나를 똑바로 볼 수 있을 때, 아무런 번뇌 없이 공(空)의 상태로 내가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우린 그 운명도 보는 순간 알아보게 돼. 그러면 영원한 사랑을 얻게 되는 거지."
"음.. 어렵잖아 너무. 그럼 넌 지금 너의 운명을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어?"
"그건 말해줄 수 없어. 하지만 잊지 마. 너 자신을 먼저 똑바로 볼 수 있어야 운명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