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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 May 03. 2022

엄마가 작아질 때

 <그림: 박새길>


딸들아.
엄마는 가끔 너무 작아져서
눈물이 날 때가 있단다.
하지만 이다음에 커서 엄마를
떠올릴 때면,
엄마의 몸속에 커다란 심장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겠니?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도 있고,
상처받은 분노를 식혀줄
바다도 있는,
지구만큼 커다란 심장 말이야.



4. 엄마가 작아질 때



큰딸 유진이가 학교 화장실에 들렀다. 옆 칸에서 친구가 “너 유진이 맞지?” 묻더란다.

유진이가 “어떻게 난 줄 알았니?”했더니 “하얀 운동화 보고 알았지. 너 맨날 그것만 신잖아.” 하더란다.


나는 미국 친구들이 운동화를 빨아 신는 걸 본 적이 없다.

솔과 세제로 신을 싹싹 빨아 신는다는 내 말을 듣고 그들은 신기해했다.

그 친구들은 여러 켤레의 신을 사놓고 돌려가며 신다가 버리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연세 드신 분들은 여전히 절약이 몸에 밴 듯하나 많은 미국 젊은이들은 무엇을 아끼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가게나 관공서, 심지어 학교까지 한밤중에도 환하게 불을 켜놓고 퇴근했다.

냉난방기 또한 온도를 맞춰놓고 밤새 돌렸다. 심지어 우리 아파트 수영장은 일 년 내내 깨끗한 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기껏해야 수영은 일 년에 석 달 정도나 할까?

그래도 물은 열두 달 내내 틀어대고 있었다.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리 좋게 봐도 낭비 같아 아쉬웠다.  


다시 신발 이야기로 돌아와서, 신발을 디자인 별로, 색깔별로 참 많이도 가지고 있는 이곳 아이들 눈에 운동화 두 켤레와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던 유진이가 어떻게 비쳤을지 난 생각도 못했다.



트윈스 데이(twin’s day)라 하여 단짝 친구와 쌍둥이처럼 꾸미고 학교에 가는 날에 있었던 일이다.

유진이는 소아 당뇨를 앓고 있던 할리와 짝이 되었다. 당뇨가 심해서 항상 엄마가 따라다니던 할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유진이는 할리가 딱했던지 함께 짝이 되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할리의 엄마도 그런 유진이가 고맙다며 데리고 나가 옷과 신발을 한 아름 사서 안겨 보냈다.

티셔츠 한 장만 맞추기로 한 애초의 계획이 틀어지자 당황했던 나는 서둘러 돈을 챙겨주었지만, 할리의 엄마는 한사코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유진이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그리고 제게 주실 돈으로 유진이 동생한테 새 신발을 사주세요.”라고 했다.         

                                

아픈 딸을 데리고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할리 엄마도 우리 아이들이 매일 같은 신발만 신고 다니는 걸  눈치챘을 거다. 그래서 나름 우리 아이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던 것 같다.

나는 굳이 우리와 미국의 문화 차이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감사히 받고 대신 수영복 한 벌을 사서 답례로 보냈다. 유진이가 받은 것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것이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상대의 호의에 보답하는 내 나름의 최선이었다.

그렇게 할리 엄마가 사준 신발은 유진이가 발가락이 아플 때까지 신었고, 동생 현주가 물려받아 잘 신고 다니다가 깨끗이 빨아 제3 국으로 보내는 기부함에 넣어졌다.


그 후로도 유진이는 신발 사달라는 소리를 참 많이 했다. 그때마다 나름 고민을 깊이 했던 것 같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신발 정도야 사줄 수 있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우리 방식으로 키운다는 소신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다음에 커서 결혼하면 아이는 딱 하나만 낳을 거야. 그래서 내 아이에게는 맨날 뽀얀 새 옷만 입힐 거야. 목이 늘어나 줄줄 흘러내리는 양말이나 누런 내복 따위 물려받게 하지 않을 거야.


3학년 체육수업시간. 당시 최고의 인기녀였던 내 친구는 가슴에 초록색 소나무를 달고 나타났다.

나 역시 문방구에서 갓 사입은 체육복을 기분 좋게 차려입은 터였다.

하지만 소나무 마크의 소녀 앞에서 누리끼리한 내 체육복은 형광 화장지와 재생 화장지의 차이를 보는 것 같았다. 희면 흴수록 쉽게 검어진다는 세상 이치가 우리들의 체육복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내 체육복이 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재생스럽게 변해갔다면 소나무 마크의 체육복은 누렇게 흙먼지를 뒤집어쓴 다음 날 바로 뽀얗게 발광하며 운동장을 누비고 다녔다.

나는 큰 언니의 플레어스커트를 갖고 싶었던 열망의 몇 곱절이나 소나무 체육복에 욕심이 났다.  


방과 후 집으로 가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쓸데없이 이것저것, 요것조것 만지작거렸다.

주인아줌마에게 뭐라 설명할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저기…… 아줌마. 하얀, 아주 아주 하얀 체육복 있어요?” 하고 물었다.

아줌마는 돈 안 되는 어린 손님에게 눈길조차 안 주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너희 학교 체육복은 다 하얘"

“하얗기는 한데 엄청나게 하얀 거요. 가슴에 나무가.”

 

채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아줌마가 딱 잘라 말했다.


“몰라. 우리 집엔 그런 거 없어. ”


문방구 아줌마의 참을성은 돼지 인중만큼도 못 되었다.

나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엄마에게 조심스레 때를 써보았다.

 

“엄마. 내 체육복만 흰색이 아니야.”

“그게 흰색이 아니면 뭐가 흰색이고?”

“내 건 누런색이야. 딴 애들은 하~얀색인데.”

“참말로 희한한 얘기 다 들어보겠다. 니게 우예 누런색이고. 니껀……”


다년간, 다자녀를 키워오신 엄마는 금세 내 의중을 알아챘다.


“가들은 어떤 츄리닝 입는데?”

“가슴에 요렇게 요렇게 나무가 두 개 있는 거.”

“그게 그래 갖고 싶나?”

“……응.”


엄마는 소심한 막내딸의 투정을 쉽게 들어줬다. 평소 언니들에게 물려받은 걸 쓰면서도 별말이 없던 애가 눈을 반짝이며 간청하자 이번에는 뭔가 있다 생각했던 것 같다.


“일나라. 해지기 전에 퍼뜩 가보자. 나무 츄리닝 사구로.”


상가가 밀집된 번화가로 통하는 다리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때 꼭 잡고 간 엄마의 손이 참 따뜻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나에게 좋은 엄마를 주신 하느님께 수없이 감사를 드렸던 것도 기억난다.

어찌나 좋던지 엄마의 손을 꼭꼭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엄마도 내 손을 꼭꼭 쥐었다 폈다.

그건 당시 우리 모녀만의 사랑 표현이었다.

우리는 손이 저릴 때까지 서로의 손을 꼭꼭 쥐었다 폈다 계속했다.

문방구 앞을 지날 때 엄마가 들어가려고 하자 팔을 잡아당겼다.

 

“여긴 어제 내가 다 봤어. 그 체육복 없어.”


엄마는 내 말에 대답은 않고 씩씩하게 문방구 문을 열며 큰소리로 물었다.


“아주무이요, 여기 가슴에 나무 달린 츄리닝 파는교.”

“우린 그런 거 없어요.”

“아~들이 나무 두 그루 있는 츄리닝 입고 다닌다 카는데 그게 뭔지 압니꺼?”

“……”

“모릅니꺼? 알면 말 좀 해주이소.”

“그거 코*롱 스포츠 마크잖아요. 요기 골목으로 들어가 보세요.”


문방구 아줌마는 남 좋은 일을 해서 속이 상했는지 불퉁한 얼굴로 팩 돌아섰다.

 

“니 문방구에서 뭐 살 거 있나……? 없나……? 그라믄 아주무이, 지우개 한 개 주이소.”


엄마는 지우개 하나 사는 걸로 ‘정보비’를 대신했다.

아줌마가 알려준 골목길로 들어서니 소나무 두 그루가 그려진 간판이 보였다.


'이제 나에게도 나무 두 그루가 아로새겨진 하아얀 체육복이 생긴다!'

 


내 가슴은 두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점원에게 미안한 건지 창피한 건지 모를 이상한 기분으로 가게를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체육복의 가격은 그때 우리 모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쌌다.

얼마나 비쌌으면, 그래도 사달라고, 이번에는 꼭 갖고 싶다고 투정 한 번 못 부리고 그냥 가게를 나왔을 정도였다.


"퍼뜩 가자. 아부지 배고프다 카시겠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꾹 닫고 앞만 보고 걸었다. 올 때보다 빠른 걸음이었지만 길은 훨씬 멀게 느껴졌다. 한참 만에 엄마가 말했다.


“내년에 또 보자.”


하지만 내년에 할인해서 체육복 값이 반 토막 난다 해도 내가 사입을 수 있는 가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는 길에는 그렇게 당당해 보이던 엄마가 돌아갈 때는 너무 작아 보였다.

작아진 엄마가 더 작아져서 뿅 하고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엄마는 꼭 잡은 내 손을 말없이 쥐었다 폈다 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쥐가 나도록 그렇게 쥐었다 폈다 했다.




기질적으로,  나는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식을 만지고 쓰다듬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아 노력 없이는 아이들에게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내가 유일하게 대신해줄 수 있는 게 바로 손을 꼭꼭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랑해.’라는 말을 대신한다는 걸 우리 아이들도 이제 알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 손을 잡았다 폈다 하면서 ‘사랑해.’라는 말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말을 되뇔 때가 갈수록 많아진다.

어릴 적 우리 엄마의 마음이 이랬구나 뼈저리게 이해되는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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