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새길>
딸들아.
만약 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이름의 뜻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너희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는
엄마 아빠의 사랑이
가득 담겼음을
알게 될 거야.
3. 모든 이름의 시작은 사랑
우리 딸들은 자기 이름을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저마다 맘에 들어하지 않는 이유도 달랐다.
“내 이름은 너무 흔해요.”
“내 이름은 너무 촌스러워요.”
어느 날, 저녁을 먹다가 유진이가 말했다.
"커서 아이를 낳으면 독특하게 이름 지을 거예요. 아들은 '화수', 딸은 '수화'."
어린 나이에 벌써 아이의 이름을 지어놓다니. 나는 미래의 손주 이름이 무슨 뜻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월화수목 할 때 화수요. 아는 한자가 그것밖에 없어요. 그래도 아마 같은 이름 가진 애들은 없을걸요?"
유진이는 이름을 반드시 한자로 지어야 되는 줄 알았나 보다.
옆에서 언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현주가 말했다.
"나는요, 아들이면 ‘토일’, 딸이면 ‘일토’라고 지을 거예요. 학교 안 가는 토요일이랑 일료일이 제일 좋으니까요.”
그러자 유진이는 한 술 더 떴다.
"미국식으로 지을 땐 '알프레도'라고 지을 거예요. 난 알프레도 스파게티를 제일 좋아하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현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현주가 좋아하는 음식을 생각하는 줄 알고 기다렸다. 잠시 후 현주가 망설이며 물었다.
"엄마. 근데요...... 아 이름을 '개..불'이라꼬 하면 이상하겠죠?"
현주는 아기 때부터 개불을 제일 좋아했다. 웃음이 터진 우리를 대신해서 유진이가 현주를 점잖게 타일렀다.
"내가 산낙지를 안 좋아해서 애 이름으로 안 썼겠니? 부모가 생각이 있어야지. 애가 학교에서 얼마나 놀림받겠니?"
언니 말이 맞다 싶었는지 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커서 아이를 낳으면 평범한 이름으로 지을 거다. 나처럼 튀는 이름은 너무 피곤하다. 게다가 내 이름의 뜻까지 무성의하다. 아버지는 왜 나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줬을까?
내 이름에는 별 뜻이 없다. 첫아들을 낳고도 아들 하나만 더 낳으라는 할머니의 성화에 계속 아이를 낳다 보니 딸이 넷. 그중에 막내가 나였다.
‘혜’를 돌림자로 두고 이런저런 이름을 만들다가 막내인 내 이름은 그냥 ‘많을 다’를 집어넣어 만들었다고 언니한테 들었다. 그렇게 해서 무척이나 독특한 내 이름이 탄생했고, 이름 때문에 내 뜻과 상관없이 눈에 띄는 아이로 살아야 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출석부를 쭉 훑어보던 선생님이 나를 호명했다.
“이. 혜. 다. 이름...... 특이하네. 나와서 문제 풀어 봐라.”
덕분에 수업 첫날을 대비해서 예습을 충실히 해가야 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소개하면 “혜자 씨?” 되물었고 “아니요! 혜다요.” 하면 “다혜 씨가 아니고요?” 하면서 장난들을 쳤다.
내 마음에 독특한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이는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자식들 이름 중에 내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가장 컸다.
“내가 이름 하나는 잘 지었지. 세상에 혜다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를 못했다. 흔하지 않고 얼마나 좋나. 다들 이름 좋다 카재?”
사실 그때까지 놀림이나 받았지 이름이 예쁘다는 소리는 듣지 못한 터라 아버지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부심을 지켜드리기 위해 그저 속으로만 투덜댈 뿐이었다.
사실 내 이름이 독특하다고 맘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니다. 내가 싫었던 건 내 이름의 뜻 때문이었다. 자식이 많아서 ‘많을 다’를 썼다니, 옛사람들 복스럽다고 복실이, 순하다고 순돌이 식으로 종 이름 짓듯 마구 지은 그 느낌이 싫었던 거다. 어디 가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내 이름의 좋은 뜻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 나의 이름 콤플렉스를 치유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대학교 입학 면접 때였다.
그날 나는 사전에 교수님들이 할 질문을 혼자 연습해보고 면접장에 들어섰다. 그곳에 앉아있던 세 분의 교수님이 내 서류를 보면서 살짝 웃었다.
“이름이 참 독특하네.”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학생. 이름의 뜻이 뭐지?”
결국, 이 중요한 순간에도 내 이름에 관한 질문이었다. 아동학과에 진학하려는 이유라든지 졸업 후에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에 관한 질문만 잔뜩 연습했는데 순간 난감했다.
‘엄마가 애를 줄줄이 많이 낳으셔서 자식이 많다고 ‘많을 다’ 자를 썼답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순간 나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고문 시간에 옛말로 ‘은혜’는 ‘사랑’을 뜻한다는 걸 배운 적이 있다. 그때 내 이름이 ‘사랑이 많다’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며 혼자 좋아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제 이름의 뜻은 은혜가 많다. 즉 사랑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름 덕분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으니 이제 그 사랑을 베풀 차례라 여기고 아동학과에 지원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캬~ 난 스스로의 기지에 만족했고 교수님들도 좋은 생각이라며 흡족해했다. 결국, 나는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면접장에서의 일을 아버지한테 그대로 말했다.
“그냥 형제자매가 많아서 ‘다’ 자를 넣었다고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사랑이 많다는 뜻으로 바꿨어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쁜 아아들 많이 낳아가 좋아서 많을 ‘다’ 자를 붙였는데 니가 한 말이랑 다른 뜻이가?”
아뿔싸! 굳이 내가 재해석하지 않았어도 아버지가 내게 지어준 이름의 속뜻과 내가 교수님들 앞에서 한 말은 하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내 이름 속 많을 다(多)에는 처음부터 사랑이 가득했다는 걸 난 그제야 깨달았다. 그저 자식이 많다고 마구잡이로 넣은 다(多)가 아니라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없이, 태어난 나를 바라보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지어준 그 ‘많을 다(多)’였다는 걸 말이다.
시간이 흘러 막상 내가 아이를 낳아보니 자식 이름 짓기가 참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누구는 작명가에게 돈을 주고 부탁한다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최고의 작명가라 해도 부모의 정성이 들어간 이름보다 잘 지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어머니가 고생해서 우리를 낳을 때마다 아버지는 기쁜 맘으로 고심했을 거다. 또, 그렇게 지은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정성 들여 우리를 키웠을 거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어떤 한자를 썼든 획수가 어떻든 자식을 향한 사랑의 시작이란 것을 부모가 되고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