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모 Apr 29. 2022

배우지 못해 배우게 되는 것들

 <그림: 박새길>


딸들아.
학교나 학원에서만 
배우는 게 아니란다.
몰라서 부끄러웠던 기억 속에서도 
뒤엉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너희가 앞으로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을 배우고 있는 거란다.



1.       배우지 못해 배우게 되는 것들



우리 아이들은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알파벳을 배웠다. 형편상 영어 유치원에 보낼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그나마 어린이집에서 배운 영어로 큰딸 유진이가 동물 이름 서너 개와 과일 이름 너덧 개를 아는 수준이었으니 둘째 현주는 말할 것도 없었다.  

A부터 F까지 알고 있던 유진이가 비행기 안에서 현주의 선생 노릇을 했다.


“A 해 봐. ‘에이’. 꼭 화났을 때 하는 말 같지?”

“에잇! 에잇!”

“삐이~ 써 봐. 바보야. 거꾸로 쓰면 어떡하니?”

“우~ B가 꼭 똥꼬 같네.”


현주가 E와 F를 혼동하자 답답한 유진이가 동생을 다그쳤고 나는 그쯤에서 아이들의 불타는 학구열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었다.


“쉿! 이제 조용히 가자. 학교 가면 다 알게 될 거야.”


남편이 석사과정을 밟았던 일리노이주까지 13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 다시 이삿짐을 싣고 13시간을  운전해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될 조지아주에 도착했다.


우리는 짐도 풀기 전에 보건소부터 찾았다. 미국은 불법체류자의 자녀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는 국가다. 그래서 아이를 입학시킬 때 복잡한 서류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마다 정해놓은 예방접종 리스트만큼은 반드시 교육청에 제출해야 했다.


유진이와 현주는 이미 한국에서 모든 접종을 마친 상태로 입국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치킨 팍스(수두 예방접종)만큼은 다시 해야 했다.


생각도 못한 상황에 아이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유독 주사를 겁내는 현주는 주사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기 시작했다.

유진이는 자기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됐어요.” 하면 주사를 놓기로 의사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한국 병원에서 하던 대로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이들을 담당한 의사는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딱 한마디 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아빠가 아이를 꽉 안으세요!”


의사는 차갑게 명령하더니 결국 유진이가 ‘하나’를 세기도 전에 주삿바늘을 그대로 찔러버렸다. 아이가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런 언니를 보고 현주가 악을 써댔고 의사의 욕하는 눈빛을 받으며 아빠가 현주의 상체를, 내가 하체를 잡고 강제로 접종을 마쳤다.


주사 맞으러 갈 때까지만 해도 미국 의사 선생님들은 모두 친절하다며 안심시켜놨건만 졸지에 당한 아이들로서는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옆에 있던 간호사는 꽤 다정했다. 과장되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아이들에게 “Good job! Sweetie.”를 반복했다. 하지만 현주는 그 소리를 듣고 더욱 약이 올라 앙앙 울어댔다.


예방접종 서류를 들고 교육청으로 가는 길에 현주가 울먹이며 내게 물었다.


“아까 그 간호사 선생님이 왜 자꾸 날 놀려요?”

“선생님이 왜 현주를 놀려? 안 그러셨어.”

“아니에요. 웃으면서 자꾸만 놀렸어요.”

“뭐라고 놀렸는데?”

“내보고…… 국자래요! 으~앙!”


아이들에게 칭찬 삼아 한 Good job이 국자로 들렸다니 우습기도 하고, 앞으로 이국땅에서 고생할 애들을 어쩌나 한숨도 나왔다.

영어학원에 보낼 형편이 못되었으면 학습지라도 시킬 걸 후회도 됐다. 아이들은 스펀지 같아서 영어의 바다에 빠뜨려두면 저절로 귀가 트이고 입이 열린다? 무슨 귀머거리가 예수를 만난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귀랑 입이 트일 리 없지 않나!

하지만 어리석게도 난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아이들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어른보다 적응속도가 빠를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들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배려하지 못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미안할 따름이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인생에는 이면이 존재하는 법.

힘들게 영어를 배우고 학교에 적응한 만큼 우리 아이들은 다른 면에서 성장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이 경험했듯 적응이 늦고 부족한 아이들에 대한 이해의 마음이 넓어진 것이다.

해마다 몇 명씩 찾아오는 한국 아이들 중에는 우리 아이들처럼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학교 측에서 우리 아이들을 불러 통역을 부탁했다. 유진이와 현주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성심껏 그 아이들을 도왔다.

그런 친구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놀림을 받는 걸 보면 당장 선생님께 달려가 대신 변호해주었고 놀리는 친구들을 혼내주기도 했다.

간혹 영어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한국말을 하는 우리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가 사귀는 것을 싫어하는 한국 부모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에게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해왔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미국에 오자마자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했고 몇 달 안 돼서 스펠링 대회나 작문대회에서 입상하는, 준비된 아이들이었다면 힘든 상황에 있는 친구들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도우려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한 번은 미안한 마음에 유진이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처음 미국 와서 힘들었지? 한국에서 영어 공부 좀 하고 왔어야 했는데.”


그러자 유진이가 펄쩍 뛰었다.


“뭐하러요? 어차피 지금 잘하잖아요. 근데 내가 영어를 못했었나?”



엄마는 내 친엄마가 아닐지 모른다. 오빠랑 큰언니만 낳고 나머지 셋은 주워왔을 거다. 나도 친구들처럼 피아노 학원에 가고 싶고 미술학원에도 가고 싶은데......


나는 일남 사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오빠와 큰언니는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사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둘째 언니부터는 사교육은 물론 유치원 교육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당시 너도나도 배우던 피아노 열풍마저도 나를 비껴갔다. 물론 음악수업 시간에 악보 읽는 법을 배웠지만, 기본 다장조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로 들렸다.

나에게 있어서 ‘도’는 다장조의 ‘도’ 외에는 없었다. 그 ‘도’가 다른 조로 가면 새로운 이름으로 불린다니 그런 배신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난 아직도 ‘도’의 배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친구들은 학원 가기 싫다고 징징댔지만 난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내가 6학년이 되어서까지 인형놀이나 하며 지냈던 이유도 ‘애가 어려서’가 아니라 순전히 할 일이 없고 심심해서였다.  


“엄마. 나도 피아노나 미술, 아니면 무용 같은 거 배우고 싶어. 아무거나 하나 다니면 안 돼?”


“뭐할라꼬. 학교 가문 다 가르쳐준다. 느그 오빠, 언니도 이거 저거 배웠는데 하나도 쓸모없더라. 전공 안 하문 다 소용읎다.”


그것이 첫째, 둘째를 통해 얻은 엄마 나름의 깨달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그런 부모님께 섭섭했고 나만 무언가를 박탈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반항심에 미술 성적이 못 나와도 엄마 탓이야.”, 음악 시험을 못 봐도 “악보도  읽는  나밖에 없어엄마 때문이야.” 라며 원망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악보도 못 읽는 내가 귀는 열려있었단 거다. 음악 교과서를 펼치면 나오는 음표는 그냥 요것보다 조것이 더 높구나 하는 정도로 도움을 줄 뿐, 어차피 책 속 노래들은 내 머릿속에 이미 들어있었다.

교과서뿐 아니라 세상 오만가지 장르와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을 나는 모두 외우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의 아버지 바흐나 어머니 헨델의 도움이 아니었다. 그저 가족들이 듣고 부르던 노래였으니 저절로 외워졌던 거다.


아기 때부터 아버지 자동차 안에서는 ‘미아리 눈물 고개, 임이 넘던 이별 고개’가 흘러나왔고, 난 학교에 가서 뜻도 모르는 그 노래를 아버지 또래 선생님들 앞에서 구성지게 불렀다. 결국, 미아리~로 중학교, 고등학교 전교 오락부장(임명장은 없었음을 밝혀둔다.)의 명예를 안고 방송 출연도 하고 교내 행사 진행도 도맡아 했다.

공부 잘하고 모범적이었던 오빠와 언니들은 전교 회장, 부회장에 반장까지 모조리 휩쓸었지만 난 중고등학교에서 예능을 도맡아 했으니 그것도 우리 가문에 다시 오지 않을 자랑거리가 아니겠는가.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방황하던 대학 시절. 어둑어둑해진 교정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랑 큰언니가 즐겨 듣던 ‘외로운 양치기’였다.

소리를 쫓아 간 그곳에서 몇몇이 모여 길쭉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악기의 이름은 ‘팬플룻’이었다. 

난 그 자리에서 당장 팬 플루트 동아리에 가입했다. 덕분에 끓어오르는 열정을 동아리 활동에 쏟아부으며 늦은 사춘기 방황을 끝내고 즐거운 대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팬플룻 연주를 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의 폭이 의외로 넓다는 거였다. 아마도 오빠와 큰언니의 영향으로 클래식과 팝을 배웠고, 조용필을 좋아하던 둘째 언니의 영향으로 가요를 배웠고  “오~ 샹젤리제~”를 크림 같은 불어로 노래하던 셋째 언니의 영향으로 샹송이며 칸초네 등 제3세계 노래까지 편식 없이 받아들인 덕분이지 싶다.


그토록 다양한 음악을 좋아한 나였지만 유독 익숙해지지 않는 장르가 있었으니 부모님이 즐겨 듣던 성인가요였다. 미아리 눈물고개로 학교에서는 나름 스타(?)가 됐지만, 솔직히 좋아서 부른 적은 없었다. 어떻게든 수업을 땡땡이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아버지가 운전 중에 ‘트로트 메들리’를 틀면 난 그때마다 투정 부렸다.


“아부지. 이문세 노래 틀어줘요.”

“금마는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드라.”

“뽕짝은 유치해요.”

“야가 뭐라 카노. 뽕짝은 사람 사는 이야기다. 학교에서도 이런 건 안 가르쳐준다.”

“에이. 그래도 난 뽕짝은 안 들을 거야.”


결국 아버지는 못내 섭섭해하며 내가 건네는 테이프를 틀어주곤 했다.




어느 날, 재미 한국방송을 틀어놓고 청소하는 내 귀로 낯익은 음악이 들려왔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치직거리는 레코드판 소리를 그대로 틀어주는 ‘그 시절, 그 노래’라는 프로였다. 나는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트로트’는 ‘사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시던 노래를 이제 내가 부모님을 그리며 따라서 읊조리고 있으니……

학교에서 배운 적 없고, 학원에서 배운 적도 없는, 그 노래가 유명 오페라보다 내 가슴에 더 콕콕 박히고 있었다.




이전 01화 추억여행을 다녀와서(머리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