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건너와 맞이하는 네 번째 여름이었다. 아침 일찍 트렁크에 짐을 싣고 캠핑을 떠나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두고 온 탓에 이른 시간 걸려오는 전화는 늘 가슴을 졸이게 했다. 전화받는 남편의 안색부터 살폈다.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놀라지 말자. 놀라지 말자.’
속으로 되뇌며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전화통화를 마친 남편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장인어른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대요.”
살아오면서 가까운 사람 중에 처음으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아버지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고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날 위해 비행기 표를 끊고 가방을 챙겨준 건 남편이었다. 한참 성수기라 표를 구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부모님 상을 당한 직계가족에 한해 항공사에서 우선적으로 비행 편을 제공해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공항까지 배웅 나온 가족과 허둥지둥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서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에 도착해서 정신없는 며칠을 보냈고,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여전히 이전과 똑같이 생활했고, 난 그렇게 의연하게 아버지를 보내드린 줄 알았다.
그날도 남편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혼자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밥공기 위로 무언가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밥상을 내려다보니 콩나물 조림과 소고기 뭇국, 바싹 구운 김에 간장 한 종지가 보였다. 평소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반찬들이었다.
그리운 냄새가 코로 들어와 나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마침내 꽁꽁 묶어두었던 그리움의 주머니를 터뜨려 버렸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밥상 위에 엎드려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그렇게 두 달을 꼬박 앓았다. 나의 불효를 곱씹으며, 후회를 거듭했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에는 아무 일 없는 듯 연기했지만, 혼자가 되면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울기만 했다.
바닥을 쳤으면 위로 떠오를 일만 남는다고 했던가? 아픈 기억을 몽땅 쏟아내고 나니 마침내 기억 밑바닥에서 추억이 동동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추억을 떠올리며 참 신기한 것을 알게 되었다. 추억 속의 나는 지금의 내 아이들과 똑 닮아 있었고, 젊었던 부모님은 지금의 나와 닮았었다는 걸.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나쁜 엄마가 아닐까 수도 없이 많이 생각했다. 아이들이 나로 인해 잘못될까 두려웠고, 부족한 엄마를 만나 상처받고 원망하는 삶을 살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추억 속의 내 부모도 나처럼 실수투성이였다는 걸 발견하고 마침내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내 부모를 이해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나의 자식들도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주리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할지 모른다. 하지만 더는 자책하고 싶지 않다.
나의 부모님처럼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툭툭 털고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면 될 것 같다.
딱 그것만 해도 아이들은 바르게 자라 줄 것이다.
추억 여행을 하며 보따리 보따리 싸온 이야기들을 여기에 풀어보려 한다. 보따리를 풀다 보니 내 아이들이 싸준 이야기도 하나 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