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 새길>
딸들아.
너희가 다투는 걸 보면,
엄마는 이모들과의 일이 떠올라.
그런데 싸우는 것도 똘똘 뭉치려고 겪는 과정인 거 아니?
나중에 커서 이 모든 걸 되돌아보면 참 재미있을 거야.
엄마랑 이모들처럼 말이야.
5. 사소함에 목숨 거는 자매의 난
미국은 부모가 아이만 두고 자리를 비웠다간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 처벌을 받게 된다.
이웃 한인 아빠가 잠이 든 아이를 차에 두고 열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다 고발당한 적도 있다.
그것도 평소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던 이웃으로부터 말이다.
미국 생활 초기에 듣고 또 듣던 주의사항이라 하도 조심하다 보니 아이들과 나는 하루 종일 껌처럼 딱 붙어 지내야 했다.
나도 아이들도 친구 하나 없이 눈 떠서 감을 때까지 우리끼리 집에 모여 지지고 볶아댔다.
아이들은 심심한 나머지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걸그룹 따라 하기’였다.
그나마 놀이를 찾았으니 다행이지만 문제는 둘이 붙기만 하면 으르렁댄다는 것.
“현주야! 네가 그쪽으로 가면 안 되지. 그럼 내 앞을 막게 되잖아.”
“유진 언니는 춤이 다르잖아. 쟤는 그렇게 안 춰.”
“너나 잘해. 네 춤은 어떻고. 꼭 막대기 같아.”
“유진 언니 니는 어떻고!”
“니? 너 지금 언니한테 니라고 했지? 엄마~~ 현주가 나더라 니라고 해요.”
지금도 달달 외울 정도로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싸움이었다.
솔직히 내가 볼 때, 둘 다 막대기였고, 둘 다 춤에는 소질 없어 보였다. 누가 누굴 지적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찾은 놀이 중에 또 하나는 ‘인형 족보 만들기’였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인형에, 인형 뽑기가 취미인 아빠가 뽑아준 인형, 거기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 받은 선물까지 더하니 그 수가 엄청나게 불었다. 평소 침대에서 인형과 함께 잠을 자던 아이들은 점점 밀려나 결국 바닥에서 자는 신세가 되었다.
남편은 망가진 침대 틀로 거실에 커다란 인형 집을 따로 만들어 주었다.
‘인형들의 대모’ 유진이가 현주에게 말했다.
“거실에서 자야하는 애들이 불쌍해.
우리 인형 가족을 만들어서 애들이 외롭지 않게 해주자.”
그렇게 만들게 된 것이 ‘인형 족보’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어쩌고 하듯 우리 집 인형들도 줄줄이 누가 누굴 낳았다는 식으로 엮였다.
곰돌이 푸우와 스모키 마운튼 산 불곰이 한국산 양을 낳고, 시카고에서 산 푸들과 UGA 풋볼 마스코트인 불독이 월마트 인형 뽑기 기린을 낳았다.
다시 양양이와 기린이 결혼하여 고양이 두 마리를 낳았으니 이런 콩가루 족보가 또 있을까. 같은 동물끼리 결혼시킬 수 없었던 이유는 개체 수가 한정적이라 도리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싸움이 생겨났다.
“싫어. 우리 토실이(희고 작은 강아지 인형)가 이렇게 귀여운데 왜 벌써 할머니가 돼야 해?”
“그렇다고 뿌기(토실이보다 몇 배 작은 거북이 인형)가 저 큰 토실이를 낳을 수는 없잖아!”
둘은 별 시답지 않은 일로 목숨 걸고 싸우다가 족보를 집어던지고 화가 나서 각자의 방으로 가버렸다.
그러다 또 며칠이 지나면 화해하고 다시 족보 적길 여러 번. 내 눈에는 뭐 저런 걸로 싸우나 싶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아기 토실이가 할머니가 되어야 하는 문제가 국가 간의 분쟁보다 덜 심각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수많은 갈등과 오랜 반목을 이겨내고 아이들은 한 권의 인형 족보를 완성해 냈으니 세계 각국 정상들은 우리 아이들을 본받을 지어다.
오늘 또 큰언니한테 맞았다. 어떨 땐 그냥 넘어가고 지 기분 나쁘면 혼내고, 쥐어박고. ‘니’라는 말이 그렇게 동생을 때릴 만큼 나쁜 말인가? 언니 니! 니! 니! 난 죽을 때까지 언니 니!라고 할 거다.
아버지의 사업이 또 한 번 실패를 겪고 우리 가족은 방 다섯 개의 맨션을 팔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집이 줄었다는 건 방 수도 그만큼 적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새로 이사한 집에는 방이 세 개였다. 부엌에 딸린 작은 창고가 있긴 하지만, 방으로 치기에는 작아도 너무 작았다.
이사 와서 가장 큰 고민은 다섯 식구가 방을 어찌 나눠 쓰냐는 거였다. 그렇다고 안방을 제외한 방 두 개를 두 명, 세 명 이렇게 나눠 쓸 수도 없었다. 장성한 오빠는 혼자서 방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그나마 작은 방을 오빠에게 주고 딸 넷이 한방을 쓰기로 했다.
이삿날, 아직 귀가하지 않은 큰 언니를 제하고 우리 셋이 누워봐도 영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리고, 우리 다리를 피아노 의자 밑으로 집어넣고 나서야 겨우 셋이 누울 수 있었는데 그나마 가운데 낀 나는 옴짝달싹 못하는 통나무 신세가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창고를 싹 비우고 좁지만 아늑한 방을 만들어 집에서 잠만 자는 고3 큰언니에게 주기로 했다.
처음엔 창고 방으로 가는 큰언니가 불쌍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작업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된 창고방을 보는 순간 동정이 질투로 바뀌었다.
바닥에는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던 붉은 본견 이불이 깔렸고, 가슴까지 올라오는 붙박이장은 중고물품 상에서 급히 공수해온 바(bar) 의자를 놓자 책상으로 변신했다.
지금 생각하면 좁고 쿵쿵한 창고에 주홍빛 조명을 밝히고 키높이 의자 하나 갖다 놓은 기형적인 모습이지만, 그때 우리 눈엔 그게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나머지 세 자매는 큰언니가 부럽고 또 부러웠다.
큰언니는 방문을 열쇠로 꽁꽁 잠그고 다녔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천하의 날다람쥐 아닌가?
여분의 열쇠 꾸러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던 나는 몰래 큰언니 방을 열고 들어가 본견 이불에 몸을 누이고, 주홍빛 조명 아래서 만화책도 읽고, 바 의자에 앉아 숙제도 하면서 종종 창고 방의 낮 주인이 되곤 했다.
온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서늘한 몸을 본견 이불속에 쏙 넣고 인형놀이를 하던 난 그만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꽝! 번쩍!
갑자기 번개가 내리쳤다. 하늘이 아닌 내 머리 위에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큰언니가 열쇠를 열고 방으로 들어선 순간 자신만의 순결한 이불에 누워서 침을 흘리며 자고 있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결벽증에 가깝게 깔끔하던 언니가 그 꼴을 보고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언니는 내 머리에 수만 볼트의 번개를 내리쳤다.
“누가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래!”
자다가 봉변당한 나는 머리를 감싸고 소리쳤다.
“언니 니는 맨날 우리 방에 와서 뒹굴면서 왜 나는 못 들어오게 하는데. 언니 니나 나나 뭐가 달라.”
“뭐? 니? 언니한테 니?”
사투리를 들으며 자란 나는 ‘언니는’ 해도 될 것을 ‘언니 니’라고 하는 게 버릇이었다. 평소엔 별 상관 안 하던 큰언니는 기분 나쁘면 항상 그걸 걸고넘어졌다. 이번에도 꿀밤으로 시작, 방 밖으로 쫓겨나는 걸로 끝이 났다.
나는 복수를 다짐했다. 그런데 이미 복수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혼자 예쁜 방을 쓰는 큰언니는 우리 모두의 적이 되어 있었다.
우리 세 자매는 밤늦게까지 큰언니의 만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의 가슴에는 분노가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때 아이디어 뱅크 둘째 언니가 손가락을 퉁기며 벌떡 일어나 앉더니 계획을 내놓았다.
“언니가 제일 약한 게 담력이잖아. 무서운 영화 본 날이면 우리 방에서 같이 자게 해달라고 떼쓰고. 그러니까 그냥 확 겁을 줘버리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시작한 우리 세 자매의 계획은 새벽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덕분에 다음 날 아침, 엄마가 엉덩이를 걷어차며 소리소리 지르고 나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지각을 면하려고 아침도 거르고 달렸지만 완벽한 작전을 머리에 되새기며 뛰자니 다리에 힘이 불끈 솟았다.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이 일일드라마를 보러 안방으로 들어간 후에 우리는 각종 도구를 챙겨서 큰언니 방으로 갔다. 붓, 물감, 인형, 끈, 왁스……
아끼던 인형을 셋째 언니 손에 건네주려니 가슴이 아팠지만, 복수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둘째 언니는 예술적 재능을 살려 붉은 물감과 검은 물감으로 조화롭게 인형을 꾸몄다. 셋째 언니는 큰 키를 이용해서 천정에 끈을 달았다.
잠시 후 그 끈에는 둘째 언니의 손을 빌어 새롭게 탄생한 괴기스러운 모습의 인형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나는 처음부터 줄기차게 한 가지에만 몰두했다. 문을 열자마자 발이 닿을 만한 곳에 왁스를 칠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때처럼 한 가지 일에 목숨 걸고 집중했던 적이 있을까! 왁스를 문지르고 부드러운 천으로 윤기 내는 일을 반복하자 바닥이 빙판처럼 미끄러워졌다. 매일 왁스로 교실바닥에 광을 내던 실력이 여기서 빛을 발할 줄이야.
마침내 방 꾸미기가 끝나자 우리는 너무도 감격스러워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환호성을 질렀다. 작품은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오렌지빛 조명 아래 인형은 선명한 핏자국을 묻힌 채 대롱거렸다. 그러나 작전의 최고봉은 뭐니 뭐니 해도 뒤로 벌렁 넘어질 만큼 엄청 미끄러운 바닥! 바로 나의 작품이었다.
이제 큰언니가 돌아와 문을 열고 자지러지게 소리 지르는 일만 남았다. 우리는 이불속에 숨어 목만 내밀고 똑딱똑딱 시계 초침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안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삐걱삐걱 마루에서 나는 소리로 보아 아버지였다. 매일 밤, 일일드라마에 이어 9시 뉴스가 끝나고 김동완 통보관의 날씨예보까지 챙겨보던 아버지였다. 날씨예보를 할 때쯤 큰언니가 현관에서 “다녀왔습니다.” 소리치면 “그래.” 한 마디 하고 10시부터 하는 드라마에 심취할 거라 예상했건만 오늘은 일기예보도 안 보고 밖으로 나온 거다. 우리는 이불속에서 잔뜩 웅크린 채 숨을 죽여가며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아버지는 먼저 우리 방 문을 열었다.
“야들이 방에 불 다 켜놓고 어데 갔니?”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김동완 통보관이 기다리셔요. 제발, 부디, 모쪼록, 안방으로 돌아가세요!’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아버지의 걸음은 식탁에서 멈추지 않았고, 냉장고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숨어 있던 큰언니 방 앞에서야 멈추었다.
‘안돼요. 아버지. 방문 열면 안 돼요!’
“혜다, 니 또 여 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바랬지만 결국
철컥!
“이기 뭐꼬!”
꽈당!
“아이고야!”
“아부지!”
연이어 터지는 소리에 안방에서 엄마가, 현관방에서 오빠가 뛰쳐나왔다.
“이기 무슨 소리고? 엄마야, 이게 다 뭐꼬!”
붉은 조명 아래 대롱거리는 인형들의 조각, 이불 밖으로 머리 풀고 고개만 내민 세 여자, 넘어지다 이불에 막혀 주저앉은 남편을 본 엄마는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엉덩방아에 허리를 다친 아버지는 오빠에게 부축받아 안방으로 가고, 집안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해졌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나는 다친 아버지 걱정과 폭풍처럼 몰아칠 엄마의 꾸중을 생각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면서 걸레로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하지만 걸레로 닦을수록 바닥은 점점 더 미끄러워지기만 했다.
언니들도 각자 벌인 일을 정리하느라 나를 도울 틈이 없었다. 나를 도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뒤늦게 귀가한 큰언니였다.
언니는 고무장갑을 끼고 걸레를 뜨거운 물에 담가 가며 왁스 칠을 벗기고 또 벗겼다. 쥐어박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몇 가지 조건이 있긴 했다. ‘니’라고 하지 않기, 밥 먹을 때 물 떠 놓기, 다시는 큰언니 방에 들어오지 않기 등등.
이런 치욕스러운 조약들을 지키지도 않을 거면서 나는 그냥 “알았어.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큰언니도 내가 그걸 지키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 “알았지? 알았냐고.” 했을 거다.
거의 매일 자매들 간의 다툼이 있었던 우리 집에 언제부터 평화가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평화와 함께 침묵도 같이 왔던 건 기억난다.
아르바이트 다니느라, 데이트하느라 바빠지면서 서로 싸울 일도 없어졌던 것 같다. 그렇게 슬슬 나이를 먹더니 언니들은 하나씩 짝을 찾아 떠났다.
두 딸이 얼굴만 부딪히면 투닥거리는 걸 보며 남편과 나는 “에그. 저것들 빨리 독립시켜서 싸우는 꼴 좀 안 봤으면 좋겠다.” 하고 투덜댄다. 하지만 다람쥐들처럼 엉켜서 장난치는 걸 보면 또, 그런 날이 빨리 오는 게 두렵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나 하나 빼고 모두 시집 장가보낸 부모님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기억난다. 북적대고 시끄럽던 시절이 그립다고. 자식들 다 키워놓으니 부모가 너무 외롭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