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선미 Nov 23. 2018

우리 사는 곳

임길택, <사람 사는 곳>

사람 사는 곳

임길택



오늘도

우리 마을 개울엔

까만 물이 흘러갑니다

우리 마을 한가운데를

우리 마을 이야기처럼

흘러갑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사람 못 살 데라

함부로 말을 하지만

우리 이웃들

조그맣게 조그맣게

어깨 맞대며 살아갑니다


오늘도 검게 물 흐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

내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 노랫소리 들려주며

오늘도 우리 마을 개울엔

까만 물이 흘러갑니다.


⟪탄광마을 아이들⟫ (실천문학 1990)




작년에 모교 방문 강의를 위해 저 다니던 초등학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서울시 북아현동에 있는 대신국민학교이지요. 그곳 강의를 앞두고 실은 많이 설렜더랬습니다. 대신국민학교는 제 어린 시절 시간과 추억과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공간topos니까요. 시간은 흘러흘러 사라지지만, 그 시간을 함께 한 공간은 움직이지 않고 거기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 너무나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작가의 출신 지역으로 그 작가의 성향을 가늠하고는 하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의미해지게 되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공간의 기억’에 아주 관심이 많았었는데, 웬걸요, 이젠 그 ‘공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게 생겼씁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것이 진실이라면, 흘러흘러 변하고 결국엔 죽는다는 사실은 진실이겠지요. 그래서 흘러흘러 변하는 시간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걸 잠시라도 눌러두고 싶은 무엇을 찾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롭게 눈이 가는 하나가 다시 생겼으니 그것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냇물입니다. 여기서는 “개울”로 나오지만, 시냇물이든 냇물이든 개울이든, 마을을 끼고 흐르는 그 물은 계속 흐르지만 변함없이 그곳에서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흐르기 때문에 조잘조잘, 이야기도 가능하구요. ‘거기, 사람 살 데 못 도ㅑ’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사북마을에서, <사람 사는 곳>이라는 제목은 그 자체가 항변이기도 할 것입니다. 3연 “오늘도 검게 물 흐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 내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라는 대목은 울컥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이상하게 함께 떠오르는 제가 좋아하는 시 한 편도 소개해 드립니다.



옛이야기 구절

정지용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펐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펐노라.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이 고이신 대로 듣고

니치대던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윗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골 밤은

찾아온 동네 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어떤 시원찮은 사람들이

끝잇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붙인 밤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신민》 1927. 1 (《향수》, 애플북스 2015)


*니치대던: 성가시게 칭얼대던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을 다룬 두 편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