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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vate Paradise, 윤선도 World

보길도, 세연정

by 월하랑
좌: Vaux-le-Vicomte / 우: Versailles



루이 14세는 자신보다 더 화려한 정원을 소유한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를 괘씸하게 여긴다. 후에 ‘베르사유 궁전’을 만드는 계기가 된 니콜라 푸케의 ‘보르 비 콩트Vaux-le-Vicomte'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보다 더 사치스러운 정원을 소유하는 것은 권위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조선시대의 정원은 전 세계의 여타 정원과 비교해보았을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좋게 말하면 절제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가난한 나라의 정원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유교를 바탕으로 건설된 나라이기에 예법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러한 예법은 위계를 분명히 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화려한 정원을 소유하여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는 도전을 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윤선도를 제외하고 말이다.





윤선도 월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땅끝, 전라남도 완도군에는 보길도가 있다. 병자호란의 패전에 상심한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려다 풍랑을 만나 자리 잡게 된 섬이라 알려진 보길도는 윤선도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해남윤씨' 가문의 지역사회에서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윤선도는 비록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쥘 수 없는 남인이었지만 타고난 사업 감각을 겸비한 부유한 예술가였다.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는 강진의 간척 사업으로 농지를 개간하고 미역 양식업으로 부를 축적하는 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스승이기도 했던 윤선도는 자신이 가진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의 괴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많은 것에 뛰어났지만 정치에서 만큼은 주목받지 못했던 윤선도는 나라가 패망하자 더 이상 중앙 정치에서 인정받기를 기대하기보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곳에서 자유롭기를 꿈꿨다. 그렇게 ‘윤선도 월드’ 건설이 시작된다.



협상가 윤선도


윤선도 월드는 거처지인 ‘곡수당과 낙서재’, 전망대이자 사색의 장소인 ‘동천석실', 그리고 윤선도 월드의 하이라이트인 세연정으로 구성된다.


(출처: 보길도 윤선도 원림 내 세연정과 세연지의 조성 환경 및 수원 에 관한 연구 / 신재열・김세호・홍영민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제26권 제4호)


보길도에서 가장 높은 격자봉과 그 맞은편 봉우리인 안산에는 낙서재와 동천석실이 있다. 그 아래 저수지로 물이 모인 후 계류를 따라 바다로 빠져나간다. 이때 바다로 빠져나가기 직전, 보를 만들어 물을 가둬놓고 정원을 만든 것이 세연정이다.




윤선도의 보길도에서의 행적은 문제가 된다. 실록에는 윤선도가 ‘처녀를 겁탈하여 섬으로 데리고 들어가 음란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윤선도는 자신이 보길도에 머무는 이유를 나라의 자원인 소나무를 관리하기 위함이라고 포장한다. 실제로 자신이 머문 이후, 누구도 함부로 소나무를 베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보길도 사유화를 정당화시킨다. 탁월한 협상가다운 발상이다. 게다가 왕의 어린 시절 스승이기도 한 윤선도가 한양에서 멀고도 먼 해남 땅 끝에 조성한 정원에 그럴듯한 명분을 입히니,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선에서 가장 화려한 정원을 만들게 된다.



과학자 윤선도



판석보


세연정의 판석보는 개간사업을 하면서 사용했던 기술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를 완성하기 위해 사용한 판석보는 화강석을 얇게 켜낸 판판한 돌판이 재료이다. 판돌을 옆면으로 나열하고 그 위를 상판으로 덮는다. 판석보의 속은 강회로 채운다. 지금으로 치면 시멘트와 비슷한 재료인데 윗부분 일부는 비워져 있다. 불을 때면 달궈진 연기가 안을 채워 따뜻했다고 한다. '보'이자 '굴뚝'인 판석보는 '다리'의 역할도 겸했다. 판석보를 건너면 높은 대에 오를 수 있어 이곳에 무희를 두고 춤추게 했다.


판석보의 모양이 굽은 이유는 물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함과 조수간만의 차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개인의 정원을 조성하면서 이토록 수준 높은 기술이 쓰일 수 있을까? 보로 막은 물이 원활하게 인공 지당으로 유입될 수 있도록 '오입삼출'기법을 사용했다. 세연정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과학의 향기는 윤선도의 지식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아티스트 윤선도


누군가 지당에 섬을 만든다면 그 섬에 나무는 심을 수 있어도 정자는 만들 수 없다. 섬에 정자를 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왕뿐이다. 윤선도는 왕이 되고 싶었다. 중앙 정계에서 남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울분을 그는 세연정에서 풀고 싶었다. 왕이 아닌 이는 섬에 정자를 만들 수 없다면 정자가 있는 곳을 섬처럼 보이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는 발상의 전환이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세연지 평면도



세연지 평면도 (출처: 문화원형백과)




보를 만들어 확보한 물은 인공 지당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계류가에 정자를 짓고 양 옆으로 물길을 내어 파 놓은 방지에 물이 차오른다. 뒤에 지당이 생기면서 정자는 계류와 방지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정자의 사방으로 물이 흐르거나 고인다. 결국 정자는 마치 섬 위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섬을 만들고 정자를 지은 것이 아니라 정자가 있던 자리 주변에 물이 흐르게 한 것일 뿐이다. 윤선도이기에 가능한 발상의 전환이다.


정자의 북쪽에는 두 개의 무대가 있다. 무대 위의 춤사위는 계류와 방지에 각각 비췬다. 작은 배를 띄우고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아이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부르고 있다. 정자 주변에는 관현악단이 풍악을 연주한다. 연출도 기획도 모두 윤선도가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이는 단 한 사람, 윤선도뿐이다. 최고의 기획자이자 사업가 그리고 과학자이자 예술가이기에 가능했던 유희다.


정원의 구성은 아름답다기보다 실험을 위한 무대 같다. 연주를 시키고, 자신이 만든 시를 부르게 하고, 그에 맞춘 춤사위가 자신이 만든 수면에 비취게 하는 것은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아 참을 수 없는 마음을 채우기 위한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정원 한가운데 앉아 세상의 중심이 된듯한 경험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느껴야 비로소 잠이 들었던 윤선도의 삶은 부유했고, 화려했지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섬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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