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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잘졔잘 Oct 16. 2018

12. 아기들은 불쌍하지 않아

임신 우울증을 자책하지 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소파에 누워 멍하니 며칠째 TV만 보며 무기력하게 지내던 나는 어느 날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임신 30주쯤 되던 시기였다.

"오빠, 휴직을 하고 나니 하루가 너무 길어. 잠깐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면 더 앉아있고 싶은데 너무 숨이 차. 집이 더러워 청소를 하고 싶어도 청소기 들고 서 있는 것도 10분을 못하겠어. 다른 산모들처럼 임산부 요가를 할 수도 없어. 그리고 휴직을 하니 돈도 벌 수 없어. 나는 너무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거 같아"


'쓸모없는 인간'의 등장

출산휴가 일주일 만에 산전 우울증이 찾아왔다. 정말 아주 솔직하게 나의 심정은 이보다 거칠었다. 친구들이 휴직을 했으니 만나자고 하지만 갈 수 없었다. 남편 없이 혼자 동네를 벗어나서 친구들과 두어 시간 놀고 돌아오는 길이 해외여행처럼 부담스러웠다. 집 앞으로 찾아오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조차도 미안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 더 힘들다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지겨웠다. 다들 늘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이마저 스트레스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니" "쌍둥이 모유수유는 너무 힘들겠다" "쌍둥이인데 배가 왜 이렇게 안 나왔니" 등 모든 질문이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이건 순전히 나의 문제다) 나도 이유를 알 수 없고 의사는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그냥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살이 많이 빠졌고 그래서 걷기도 앉기도 힘들다는 말을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할 수도 없었다. 쌍둥이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몸이 좀 더 무겁고 좀 더 숨이 차고 그래서 좀 더 일찍 휴직을 들어왔다는 설명도 지긋지긋했다.


우울한 마음을 본격적으로 키운 건 사실 임신성 당뇨다. 임신성 당뇨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없게 하고, 집에서 마음 놓고 쉴 수도 없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6대 영양소를 두루 갖춘 식단으로 아침을 차려야 한다. 아침에는 남편이 이 일을 해주고 출근하지만 점심은 온전히 나의 일이다. 귀찮다고 밥을 거를 수도 없고 반드시 먹어야 하기 때문에 계속 늘어져 누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밖에 나가서 짠 음식을 마구 사 먹을 수도 없고 시켜먹을 수도 없다. 계속 식단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서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기들을 위해서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니 당뇨 관리는 나를 무척이나 고단하게 했다. 생일이라서, 결혼기념일이라서, 친구를 만나서 등 다양한 이유로 폭주하는 날이 많아졌다. 칼로리 폭탄 케이크를 먹고 피자를 시켜먹기도 했다. 그런 날은 120을 넘겨선 안 되는 혈당이 140을 넘어섰고 밤이 되면 죄책감에 시달렸다.


밤에 침대에 누워 "의사 말처럼 거대아가 태어나면 어쩌지" "아이들이 살면서 당뇨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잠을 자지 못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아버지가 신장 질환을 앓고 있어 '평생 식단관리를 해야 하는 것'의 고통에 대해 잘 안다. 내가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식단관리에 스트레스받는 이유기도 하다. 나는 점점 두 명의 자아와 싸우기 시작했다.



모든 걸 되돌리고 싶어!


쌍둥이가 아니라면 괜찮았을까.

어느 날 오후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쌍둥이를 임신하지 않았다면, 그냥 평범하게 한 명의 아들 혹은 딸을 임신했다면 이보다 덜 힘들었을까. 생각이 깊어지면서 우울함은 극단적으로 커졌다. 임신 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변하고 종일 투덜대기만 하는 내가 싫었지만 생각을 멈출 수없었다.  임신 전 늘 즐겁고 신나게 살았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겹치면서 눈물이 났고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직접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지만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나는 왜 임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부터 시작해 왜 나에게 쌍둥이가 생긴 걸까 하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궁금증까지 부정적인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별일 없이 전화한 엄마에게 나도 모르게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걸"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번엔 미안함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실로 정신병적 행동이다. 아기들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챈 건 아닐까, 내 목소리를 들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아기들의 잘못은 더욱더 아닌데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내가 못마땅하고 답답했다. 엄마는 "혼자 있으니 괜히 생각이 많아져서 그렇다"며 "엄마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라고 나를 위로했다. "아기들이 다 듣는다"라고 다그치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기들은 불쌍하지 않아

남편이 퇴근했다. 남편에게 이런 나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다른 엄마들처럼 아기 방을 꾸미는 것도 귀찮고 내가 예쁘게 꾸며놓은 집을 아기를 위해서 바꾸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 쌍둥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이렇게 몸이 힘들지도 않았을 테고 오빠가 나 때문에 힘들지도 않았을 거야" "병원비가 이 정도로 많이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모든 게 다 내가 쌍둥이를 가졌기 때문이야"

라는 이상한 소리를 한참 늘어놓다가,


"오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엄마라는 게 얘들에게는 너무 불행한 일이야. 불쌍해. 나는 엄마 자격이 없나 봐" 라며 자책하길 반복했다.


"아기들은 불쌍하지 않아"

내 하소연을 한참 듣던 남편은 단호하게 말했다. 남편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너의 잘못도 아니다"라며 "어쨌든 태어나면 우리보다는 더 재밌고 좋은 환경에서 자랄 텐데 대체 뭐가 불쌍하냐"라고 물었다. 또 "스스로 임산부는 환자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그냥 누워서 남들에게 대접받는 시간을 즐기라"라고 말했다. 가끔 미운 말을 하다가도 늘 감사한 남편이다.


그 날 주변 사람들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 내 행동은 조금 달라졌다. 임신 초반에 우려할 만한 일이 많아 지나치게 모든 일에 조심했지만 '이제 출산이 한 달 남았다'며 조금 여유 있게 행동하기로 했다. 너무 가고 싶었던 콘서트에 남편과 함께 가기도 했다.  4시간 가까이 야외에서 공연을 보느라 너무 힘들었고 실제로 그날 밤에 잠을 자기 어려울 정도의 통증이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즐거웠다. 실제로 잠깐 힘들었을 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자 그간 두려움이 과도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편하다.

임산부 카페에 가면 진리처럼 이 말이 댓글로 떠돈다. 하지만 엄마가 행복하기는 쉽지 않다. 주변의 시선, 조언은 늘 스트레스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이 산모에게 무관심할 수도 없다.

아기는 걱정되지만 아기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라져만 가는 나를 바라보는 건 더 고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기를 위해서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요하는데 어떻게 엄마가 행복할 수 있을까.


근데 정말 그렇다. 임신 기간 중 숱한 이벤트로 병원을 오가면서 나는 이렇게 힘든데 신기하게도 뱃속 아기는 잘만 자란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또 스트레스를 받아 흥분하면 배가 뭉쳐 딱딱해지는 인체의 신비를 경험하기도 했다.


언젠가 내 딸들이 이 글을 읽고 나의 보잘것없는 모성애에 서운함을 느끼진 않을까. 하지만 이 역시 그 아이들이 최소 20년은 함께 살아야 할 '동거인'의 솔직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모든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겠지만 그들을 낳고 길러내는 건 고되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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