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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잘졔잘 Nov 05. 2018

14. 내 딸이 범죄자가 된다면?

생전 처음, 그리고 영원히 처음일 어려운 부모 노릇

나는 사실 아들을 낳고 싶었다. 쌍둥이를 상상하지 않았을 때는 딸보다는 아들을 낳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기집이 두 개고, 둘 다 여지없이 여자 아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땐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딸 키우기 힘들잖아... 흉흉한 사건도 많고"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매일 아침 흉흉하고 끔찍한 소식뿐이다. 유치원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중학생, 고등학생 성폭행 사건은 거의 매일 발생한다.  "아이를 맘 놓고 밖에 내놓을 수 있을까?" "아이가 큰다고 마음이 놓일까?" 하는 불안한 마음은 사실 임신 전부터 늘 갖고 있었다. 딸을 낳는다면 이런 불안함을 영원히 안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아들 가진 엄마는... 내 아들이 그런 가해자가 될까 봐 무서워..."


그래서인지 친구의 이 말은 계속 뇌리에 남았다. 어떤 친구는 "내 아들이 그런 범죄의 가해자가 된다면 나는 아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고 싶을 거 같아"라고 말했고, 또 다른 친구는 "당연히 감옥에 보내야지... 그리고 나도 인연을 끊어버리지 않을까"


서로 다른 극단적 선택이지만 결국은 너무 아들을 좋아해서 아니, 사랑해서 내릴 수밖에 없는 선택. 한 친구는 "내가 부디 그 상황에서 '내 아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당신 딸이 잘못했겠지'라고 말하는 엄마가 아니었으면..."하고 말 끝을 흐렸다.


누구나 가해자의 엄마가 될 수 있다

몇 해 전 수 클리 볼트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1999년 벌어진 미국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 딜런 클리볼트의 어머니 수 클리볼트가 사건 발생 후 17년 간의 일을 회고한 글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내용이 전부 와 닿지 않았다. 부모가 가해자인 아들을 무조건 두둔하지도 않지만 책 곳곳에는 어쩔 수 없이 내 아들 위주로 생각하는 구절도 묻어났다. 나는 책을 다 읽고 오히려 피해자의 부모들이 이 책을 보면 어떤 심경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임신 후 이 책을 한 번 더 펴 들었을 때는 책장을 넘기기가 너무나 힘겨웠다. 계속해서 '내 자식이 이랬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읽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될 괴로운 생각인데, 계속해서 읽어야 했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라는 저자의 말이 계속 머리를 복잡하게 한 탓이다.  


저자의 가정은 화목했고 아들인 딜런은 늘 문제가 없었다. (아니, 문제가 있었지만 부모가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늘 친절한 이웃과 친구들이 있었다. 부모는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자상하게 딜런을 교육했다. 그래서 사건 발생 2년 후 경찰서에서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범죄와 마주했을 때 느낀 참담함은 너무나 컸다. 특히 아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저자는 비로소 "지난 17년간 내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에 몰입돼 있던 시간에서 벗어난다. 객관적으로 죽은 아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


저자가 다른 사람들처럼 아들을 '악마'로 생각한 건 아니다. 뉴스를 통해 처음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저자는 아들이 빨리 자살하고 이 끔찍한 범죄를 멈추길 바랐지만, 후에 그런 생각을 후회했다고 한다. 아들이 미치게 그리우니까. 이 부분이 나는 너무 서럽고 슬펐다.


엄마와 자식은 '다른 사람'이다

 

세상은 늘 '가정교육'을 강조한다. 하지만 부모 노릇을 앞둔 나는 이게 사실 버겁다. 나 역시 부모가 처음이고, 심지어 내가 살고 있는 이 인생도 처음 아닌가. '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는 임신 열 달 내내 중요한 화두였다. 나처럼 걸핏하면 우울해지는 사람이면 어쩌지, 배움이 느려 쉽게 좌절하는 성향이면 어쩌지, 나처럼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눈치 보며 살다 혹시 본인의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인생을 살면 어쩔까. 걱정은 많지만 해결방법은 모른다. '자식'을 '양육'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전문가의 이론이 100% 맞는 것도 아니니까.

내 어머니의 양육방식은 절대적으로 옳았을까. 어떤 부분은 분명 너무나 과분하게 좋았지만 일부는 나와 맞지 않았다. 부정적 영향을 미친 요인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큰 사건, 사고 없이 그럭저럭 자랐을 뿐이다.

 

'아이들이 내 분신이라는 생각 따위는 집어치우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건 나의 의무다. 하다못해 내 배에서 나온 아이가 아니더라도 키우기로 결심했다면 부모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환경이 완벽하지 못한 것까지 내가 자책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 아이들과 지금 혈관을 공유한다고 해서 이들이 곧장 나의 일부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내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나와 다른 사람이고 다른 삶을 산다는 사실을 인정 해야한다.

보살핌이라는 의무를 다 하며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성장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잉보호 가정에서 자란 내게는 다소 어려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양육은 어쩌면 내가 미성숙하다는 걸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듯하다.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 지도 예측할 수 없는데 남(=자식)의 인생을 가늠하는 건 당연히 가당치도 않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아이가 좋은 사람이 되리란 보장이 없다. 어쩌면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력해야 한다. 함께 이 가족공동체를 꾸려나가는 동반자로서, 내가 꾸린 이 소중한 가정이 '파탄 나지 않도록' 대화하고 설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공동의 목표에 아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겠다. (진짜 모르겠음) 다만 나의 노력이 유효하려면 건강한 사회라는 전제가 성립해야겠지. 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아이가 좋은 생각을 하고 살 수 있도록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노력해야겠다.

오늘도 결론은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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