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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랩 Oct 24. 2021

도시의 어떤 장소에 대한 사랑(2)

고속도로를 사랑한다는 것

고속도로를  많이 애용한다. 경부, 중부, 경인, 영동, 호남, 남해, 그리고... 88고속도로만 알면 우리나라 고속도로 전부를 외우는 것이던 시절도 있었는데 하나   늘어나 지금은  개일까? (찾고 싶지만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통계 사이트엔 제대로 나와있지 않을  같고, 검색하면 나무위키가 바로 뜨겠지만 거기엔 내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도 많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원 픽(One Pick)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이다. 서울은 스치듯 지나고 거의 대부분의 구간이 경기도를 링 형태로 관통하는데 왜 서울의 외곽으로 불리어야 하는가, 하는 어찌보면 타당한 의견을 반영하여, 9월부터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로 이름이 바뀐다고 한다. 이미 일부 이정표엔 수도권제1순환선이라는 이름을 반영하고 있기도. 아무튼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내가 가장 애용하는 고속도로이다. 물론 자차 운전자가 되기 전엔 전혀 탈 일이 없는 고속도로이기도 했다. 내가 가끔 이용하던 광역버스는 주로 경부, 중부를 이용하거나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버금가는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고속화도로(분당-내곡, 분당-수서, 과천-봉담)를 이용하였고 글쎄 외곽을 이용하는 노선은 없었다.


그런데 차를 사고 보니(더 정확하게는 운전을 시작하고 보니), '서울과 성남', '서울과 안양', '서울과 고양', '서울과 광명'처럼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선형으로 루트를 찾아가던 지도가 이제 말하자면, 대륙으로 클리어되는 느낌이었다.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을 하다보면 처음엔 특정도시를 잇는 루트만 클어하다가 찾아가는 도시가 많아지면 어느 순간 유럽 남부, 유럽 중부, 유럽 북부 같이 큰 지도를 얻게되지 않는가. (더 최신 게임의 예를 들고 싶지만 나의 게임이력이 대항해시대에 머물러 있어서... 좀 그렇다) 그런 느낌으로 사이좋게 붙어있는 경기도의 각 시군을 열심히 돌기 시작했다. 물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함께.


물론 이전에도 성남과 용인, 용인과 수원, 안양-군포-의왕-과천과 같이 생활권을 같이하는 도시들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서현역에서 버스를 한 시간도 넘게 타야 겨우 수원에 도착한 적도 있고, 집은 군포인 친구가 과천으로 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시간으로 경계를 목도하며 움직이는 기분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각 시군의 경계와 경계는 부드럽게(순전히 나의 기분이다), 그리고 속도감 있게 이어진다. 예를 들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이름이 너무 길다. 앞으로 그냥 외곽순환도로라고 부르겠다)를 타면 성남에서 고양까지 갈 수 있다. 물론 의왕, 안양, 군포, 안산, 시흥, 인천, 부천, 다시 인천, 김포를 거쳐야 하지만 말이다. 혹시... 고양에서 구리를 갈 수 있다는 점도 아는가. 양주, 의정부, 서울, 남양주를 지나면 도착할 수 있다고. 이런 기분이었다. 이렇게 다 붙어있고 이렇게 다 지나서 갈 수 있어! 모두가 맞닿아 있다는 사실에 너무 경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고속도로는 말 그대로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막히는 시간만 아니면 경기도 주요 지점 간에, '이게 이 시간에 가능해?' 하는 시간 거리가 된다. 예를 들어, 구리에서 송추 스타벅스까지는 28분이 걸린다. 송내역에서 고양 스타필드까지는 29분, 판교에서 광명 이케아까지는 29분이 걸린다. (부천시민이 고양 스타필드를 이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Correction. 판교에서 광명 이케아까지는 27분이 걸리는 길도 있다. 그렇다,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다. 안양-성남 고속도로와 구리-포천 고속도로가 그렇다. 민자고속도로이기 때문에 조금 더 비싼 요금을 내야하지만 기분만은 큰 반경으로 돌아가던 모퉁이를 좀 더 스마트하게 작은 반경으로 잽싸게 도는 기분이다. 이 두 고속도로는 더 긴 구간의 일부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안양-성남 고속도로는 제2경인고속도로의 일부이고 구리-포천 고속도로는 건설 중인 서울-세종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세종-포천 고속도로가 될 예정이다.


새로운 맵을 클리어했다는 기분이 지나가면, 다시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외곽순환도로를 만나게 된다. 막히는 시간만 아니면 안 막히는 이 도로는 막히는 시간엔 미치도록 막히는 도로가 되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신지로를 따라해보았다) 그러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경기도민들이 열심히 각자의 자리에서 노동을 마치고 저마다 집으로 향하는구나!', 또는 '서울시민들이, 경기도가 아낌없이 내어주는 좋은 것들(이케아, 스타필드, 프리미엄아울렛)을 실컷 누리고 집에 가는구나.'하는 생각이다. 그래, 그럴 때마다 (다들) 제일 고생이다, 싶고. 가다서다 서행을 반복하는 구간에서, 방음벽 너머로, 교각 아래로 보는 경기도의 풍경은 또 얼마나 지겹게 매일매일 보는 것인지. 경계와 경계를 넘는다는 기분은 있지만 사실 그 사이는 지루한 풍경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빈도는 다르지만 산과 터널, 멀리에 아파트, 그러다가 갑자기 가까이에 아파트, 창고, 작은 공장, 비닐하우스가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풍경.


지루해지면 쉴 곳이 필요하다. 졸음쉼터와 간이 휴게소. 물론 나는 피곤하지 않을 때에도 휴게소에 들른다. 구리남양주 톨게이트 옆 졸음쉼터는 차선을 잘 타야한다. 각종 하이패스 안내 차선에 흔들림 없이 졸음쉼터만을 바라보고 와야 한다. 이러다가 하이패스/현금을 헛갈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기지만 이정표를 믿어야 한다. (졸음쉼터에 들어올 때까지도 요금을 내는 곳이 없다, 요금을 안 받나, 싶지만 그럴 리 없고 정산소는 출구에 있다) 입구로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것은 편의점. 드물게 편의점이 있는 간이 휴게소 급의 졸음쉼터인 것이다. 서하남 부근에는 이보다는 크지만 일반 휴게소보다는 한참 작은 곳도 있다. 그래도 편의점과 주유소가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들러볼 만 하다. 성남 톨게이트 옆에는, 편의점은 없고 졸음쉼터와 주유소가 있다.


간이 휴게소 뿐이던 외곽순환도로에 정규 휴게소가 생긴 것은 2017년 말이었다. 바로 시흥 하늘휴게소인데 이름처럼 하늘에 떠 있는 휴게소로, 휴게소 건설에 필요한 대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운 실정에서 등장한 이른 바, '상공형 휴게소'의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도로에 단 하나 뿐인 정규 휴게소인데다가 다른 휴게소의 성공사례를 연구하였는지, 거의 대형마트 수준으로 매장을 꾸며놓은 탓에 덕평자연휴게소와 행담도휴게소의 뒤를 이어 전국 매출 3위의 휴게소로 안착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조금... 무섭다. 공학은 오케이지만 심리학은 좀 무섭다고 하는.


원래 이렇게 휴게소 이야기까지 하려던 건 아니고, 성남 톨게이트를 지나는데 유튜브(프리미엄! 물론 운전 중엔 사운드만 듣는다)가 영특하게도 Ace of Base의 <All That She Wants>와 <Sign>을 연달아 들려준 후 Kylie Minogue의 <Can't Get You Out of My Head>, Gwen Stefani의 <Cool>을 이어서 들려준 걸 쓰고 싶었다. (드디어 오랫동안 가르친 효과가 있었나, 싶었는데 바로 다음 곡으로 Sixpence None The Richer의 <Kiss Me>를 들려주어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기도)  그렇게 숫제 화음까지 넣어가며 송파 IC까지 통과하다가 문득 외곽순환도로를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뜨고 지는 해처럼 무심코 지나치는 이정표와 익숙하고 지겹지만 가끔 화음을 넣어 지내고 싶은 일상을 함께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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