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는 죽어서도 먹물을 뿌린다

오징어와의 전쟁 com 그림일기

by 초록풀잎

“으악!”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얼굴과 옷, 주방 벽면에 시커먼 물이 튀었다. 얼굴에 튄 물을 닦아내니 물씬 비린내가 풍겼다. 그 시커먼 물의 정체는 바로 오징어 먹물이었다.


손질이 되어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저 먹고 싶어 주문한 오징어. 그런데 받고 보니 그냥 통 오징어였다. 급히 오징어 손질법을 검색했다. 몸통에 숟가락을 넣고 내장을 쭉 빼내면 손쉽게 손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야심 차게 도전했는데 내장을 끄집어내고 보니 더욱 난감해졌다. 이 내장 부분을 다리와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 걸까. 다리와 내장 사이에 오징어의 눈이 붙어 있었다. 생선도 그렇고 눈을 보면 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오징어의 다리를 분리해보고자 가위를 들고 자르다가 그만, 오징어의 먹물을 건드려버렸다. 시커먼 먹물이 얼굴과 옷에, 그리고 주방 벽에 튀었다. 게다가 한 번이 아니었다. 계속 가위질을 했더니 먹물은 또 튀어 올랐다. 그렇게 곳곳에 먹물을 뿌린 후에야 오징어와의 전쟁이 끝났다. 옷에 튄 오징어 먹물의 비린내를 맡으며 오징어를 썰고, 볶았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계속 그 냄새가 나는 듯했다. 다행히 오징어 볶음은 맛있었다. 이렇게 만들었는데 맛없었으면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요리를 잘 못 해서, 특히 밑반찬을 잘 못 만들어서 그냥 매일같이 한 그릇 음식을 먹는다. 카레, 파스타, 찜닭, 볶음밥 등 그냥 한 그릇으로 만들어 내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그런 음식 말이다. 아니면 굽기만 하면 되는 삼겹살이나 스테이크를 자주 먹고, 곁들여 먹는 채소도 양념 없이 생으로 오이나 파프리카를 썰어 먹는다. 나물무침이나 조림 등의 밑반찬은 친정에서나 먹는 소중하고 희귀한 것이다. 거의 비슷한 한 그릇 음식들로 끼니를 때우지만, 그동안은 세 식구 둘러앉아 밥 먹는 일이 대게 저녁 한 끼뿐이었으니 돌려막기를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지난해 1월, 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브라질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코로나가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후 코로나로 인한 격리 때문에 삼시 세끼 밥을 하다 보니 나의 요리 실력은 금세 밑천이 바닥났다. 아침은 대충 빵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다고 해도 재택근무하는 남편, 온라인 수업하는 아이와 매일 점심, 저녁 두 끼를 먹다 보니 새로운 메뉴가 필요했다. 게다가 나는 원래 해물 요리를 좋아하는데 나가서 사 먹을 곳도 마땅찮고, 친정엄마 찬스를 쓸 수도 없어서 결국 내가 도전해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해물 요리는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엄마가 해준 꽃게탕 맛을 생각하며 사 온 꽃게는 손질이 정말 어려웠다. 깨끗이 씻는 것부터 힘들었는데 솔을 가지고 껍데기와 집게다리 사이사이를 닦다가 손가락을 찔리기까지 했다.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던 감바스 역시 새우를 씻고 난 후 머리와 몸통을 분리하고, 껍질을 벗겨야 했는데 벗기다 지쳐서 나중에는 그냥 껍질 채 넣어버렸다. 재료 손질에는 애를 먹었지만, 막상 만들어보니 맛이 있어서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이번에 오징어 볶음에 도전했다가 오징어 먹물 맛을 제대로 본 것이다.


문득 고등학교 때 다니던 독서실의 공중전화가 떠올랐다. 공부한다고 독서실에 가 있으면 엄마가 전화하라고 삐삐를 치곤 했다. 전화를 걸면 엄마는 대개 뭘 먹고 싶은지를 물으셨다. 저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놓겠다고 말이다. 당시 내가 제일 자주 말했던 음식은 해물탕이었다. 꽃게와 새우, 각종 조개에 낙지까지 들어간 엄마표 해물탕은 국물이 정말 일품이었다. 각종 해산물을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먹고, 국물을 떠먹다 보면 배가 터지도록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배가 불러도 그 맛있는 것을 남길 수가 없어서 마지막 한 방울의 국물까지 다 먹었던 엄마표 해물탕.


결혼하고 나서 친정에 갈 때면 엄마, 아빠는 딸과 사위를 위해 주꾸미 삼겹살 볶음을 자주 해주셨다. 이 역시 배불리 먹어도 계속 먹고 싶은 마성의 음식이다. 삼겹살의 맛과, 주꾸미의 맛이 얼마나 조화로운지 삼겹살 한 번, 주꾸미 한 번 골고루 먹다 보면 어느새 채소와 양념만 남는다. 거기에 밥을 비벼서 참기름을 뿌리면 최고의 볶음밥이 탄생한다.


엄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는 상을 차리고 수저를 놓는 일만 하고 먹기만 했을 뿐 거들지 않아 몰랐는데 막상 내가 오징어 먹물 테러를 당하고 보니 그 준비과정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다. 해산물 손질 담당은 주로 아빠였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엄마가 양념하고 아빠가 손질한 주꾸미 삼겹살 볶음 먹고 싶다. 어렸을 때 먹었던 해물탕도 먹고 싶다. 엄마, 아빠랑 자주 가던 인사동의 아귀찜도 먹고 싶다. 아쉬운 대로 이곳 한인타운에 해산물 식당이 있나 찾아보고 싶은데 코로나로 인해 격리 단계 격상이라 주말에 음식점 문을 닫아야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서글프다. 정녕 오징어와 다시 싸워 봐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남편에게 아빠를 본받아 오징어 손질을 해보라고 해야겠다. 남편에게 소질이 보이면 다음엔 주꾸미 삼겹살 볶음에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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