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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Mar 15. 2024

"센스 있는 제목" 칭찬 받은 비결

[제목 레시피] 패러디

호접란에 관한 글을 보게 되었다. 개업식이나 회사 인사이동 철이면 자주 보았던 그 서양란. 과습만 주의하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키울 수 있는 난이라고 소개하는 내용이었는데, 때는 코로나 시기로 반려식물을 키우며 위로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좋은 글감이었다.


이럴 때, 그러니까 일반 대중들의 관심 거리를 잘 캐치한 글을 검토하게 될 때 나는 욕심이 난다. 제목을 좀 더 잘 뽑고 싶은. 대중들의 관심이 많다는 건 조회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니까. 아, 이놈의 직업병.

제목과 의미를 한번에

제목을 고민하면서 이 글에서 찾은 키워드와 문장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김영란법, 개업, 승진 축하 용도, 서양란이 생각보다 비싼 식물은 아니’라는 것. 특히 ‘사망하는 이유 1위는 과습’ 같은 문장. 또 ‘적당히 무심한’이란 말이나 ‘죽은 날짜를 받아놓은 것처럼’, ‘엄청난 생명력’, ‘단단한 한 방이 있는 녀석’ 같은 것들도 제목으로 써먹을 만한 표현으로 보였다.

‘제목에 호접란이라고 밝힐까?’ 아니, 빼자. ‘호접란에 대한 내용인가 보군’ 하고 일단 거르고 볼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서다. 그래서 ‘개업승진축하’ 용도라는 힌트만 주기로 한다. ‘개업, 승진에 빠지지 않는 이 식물...’ 이렇게. 그런데 그 다음에는 뭘 넣지? 고민스러웠다. 머릿속이 드럼 세탁기 속 통처럼 돌아가기 시작한다.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려는 머리 싸움. 그때 ‘사망하는 이유 1위는 과습이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한번 연결시켜 보았다.

‘개업, 승진에 빠지지 않는 이 식물이 죽는 이유 1위’

그런데 아무리 소리 내어 읽어봐도 입에 착 붙지를 않았다. 어쩐다 싶을 때 생각난 게 <오징어 게임>의 대사였다. 우리집 둘째가 매일 흥얼거리는 “이러다 다 죽어”라는 그 유행어! 드라마 흥행과 함께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말을 접목해 패러디 하면 재밌겠다 싶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문장이 '개업, 승진에 빠지지 않는 이 식물... 이러면 다 죽어'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거둘 수 있는 패러디는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것으로, 드라마나 영화의 제목이나 장면, 화제가 되는 인물의 말 혹은 뉴스 등을 활용해서 제목을 지을 때 요긴한 수법이다. 물론 타인의 저작물을 바탕으로 패러디할 경우에는 저작권 문제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화폐 도안으로 논란이 된 십원빵. 패러디를 했더라도 창작성을 나타내지 못하면 성공한 패러디로 보기 어렵다.

얼마전 대통령이 참가한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부자감세 중단하고 연구개발 예산을 복원하라"는 요구를 공개적으로 해 경호원들에게 '입틀막'을 당하고 끌려가 논란이 된 일이 있었다. 그걸 패러디한 제목이 '대통령이 국가인권위에 제소되어으읍읍'. 이를 본 독자가 '기자님 기사 제목 센스 있다 ㅋㅋㅋ으으읍(입틀막)'이라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날씨 기사가 제목 하나로 수십만 조회수


개인적으로 패러디 하면 유독 생각나는 제목이 있다. 2021년 2월 28일자 한겨레 신문에 보도된 ‘님아, 그 패딩을 넣지 마오…내일부터 비 100㎜, 폭설 50㎝’이다. 그저 날씨 기사일 뿐인데 당시 댓글이 폭발적이었다. 대부분 악플이 가득한 포털 댓글에 1급수 댓글들이 줄줄이 달려 화제가 되었다.


‘제목 너무 귀여워서 기사 읽으러 들어옴 ㅋㅋㅋ’

‘제목 센스가 기가 막히네요.’

‘제목 보고 들어왔습니다.’

‘센스있는 기사 제목 아주 좋네요, 유쾌해졌어요.’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님아, 그 패딩을 넣지 마오' 이 문장은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를 패러디 한 것이다. 이 제목을 누가 지었을까, 궁금했다.


알고 보니  ‘디지털 기사의 제목을 쓰고, 사진을 고르고, 기사를 배치하고, 트위터·페이스북 공식 계정을 운영하는’ 한겨레 신문 디지털뉴스팀에서 일하는 석진희씨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한겨레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에 그의 글이 실려서다.


그 글의 제목도 귀엽고 재밌다. “제목 너무 귀여워서 기사 읽으러 들어옴 ㅋㅋㅋ” 이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제목으로, 다소 평범해 보이는 날씨 기사가 제목 하나로 수십만 조회수가 나오게 된 이야기를 담았다. 에디터가 기사를 쓰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서 더 기억에 남았다.

 

당시 취재 부서에서 뽑은 제목은 ‘1~2일 수도권 최대 100㎜ 비, 강원영동 최대 50㎝ 폭설’이었다. 딱 봐도 참 드라이한, 사실 전달에 충실한 제목이다.


그런데 석씨는 다소 평범해 보이는 이 날씨 예보 기사에서 평범하지 않은 몇 가지 이유를 잡아낸다. 그건 ‘반전 날씨’였다. 석씨는 (지난 1월 폭설에 이어) ‘또 한번 방심할 수 없는 추위와 폭설이 이 뉴스의 핵심’이라고 보았지만 그렇게만 사실만 전달하고 싶진 않았다고.


‘3분의 두뇌 풀가동 끝에 ‘님아’ 두 글자가 떠올랐‘고,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패러디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단다. ’초봄 온기에 패딩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을 많은 이들의 ‘같은 마음’을 모서리 삼아, 거기를 딱 움켜쥐었습니다‘라고 제목을 짓기까지의 고민을 전했다.
 
이 기사의 말미에 석진희씨는 말한다. “단신에 가까운 기사 하나도 차별화를 주고 싶은 정성 그리고 그 정성을 독자들도 알아본다”라고. 그 정성을 알아보는 독자보다 그렇지 않은 독자가 훨씬 많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건 어쩌면 자기 암시 같은 거일지도 모르겠다.


목을 기억해주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고 대부분은 그냥 휘발되고 말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는 일까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도 치부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나를 존중해야 상대방도 나를 존중하듯, 내가 일을 존중하고 아껴야 상대방도 일을 존중한다는 마음으로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문장을 꿰었으리라. 그와 '같은 마음'을 나도 한번 꽉 움켜쥐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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