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냥 제주도에서 살까?

10년 전 아내와의 약속을 떠올리다.

by 제주 아빠


여름을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9월까지만 휴직을 썼기 때문에 이 여름이 끝나면 마치 신기루처럼 육아휴직도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게 현실이었다. 나의 일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2개월가량 가족들을 두고 혼자 육지에 올라가는 것이 마음에 못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여러 이유로 9월까지만 육아휴직을 썼지만 더 쓸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이제 와서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아내는 당연히 부부는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먼저 내가 올라가 자리를 잡으면 연세 계약이 끝나는 12월 1일부로 육지로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역시나 육지에 가고 싶지 않다고 아우성이었다. 아이들에겐 아직 시간이 많기 때문에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만 사실 나는 제주도에 내려오는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제주도로의 완전한 이주에 대해 고민해왔었다.


제주도에 내려오고 적응을 좀 하고 난 후로는 매일 새벽기도, 수요예배, 주일예배를 빠뜨리지 않고 다니면서 소모임도 가졌다. 코로나가 너무 심해져서 종교행사 집합 금지 명령이 내려온 이후에야 교회 방문이 뜸해졌지만 매일같이 가서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보며 고민했던 내용은 내가 나아갈 길과 멈춰 서야 할 길에 대한 내용이었다. 신의 계시 같은 것을 믿지는 않는다. 물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에 목매달고 사는 신자는 아니기 때문에 나의 자유의지를 믿는다. 분명한 건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 자체는 매우 중요한 어떤 운명적인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기도 가운데에는 어떠한 목표를 두고 이뤄달라고 하기보다는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나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소망과 그것이 선한 목적 때문인지를 반문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있었다.


아이들과 사라오름에 오른다. 정상까지는 무리겠지만 사라오름까지는 해보자 응원하며 걸었는데 끝내 해냈다. 마지막 1km를 남기고 똥 마렵다고 징징대는 아들을 업고 뛴 것은 비밀.


아내는 오랜 주말부부와 레바논 파병 시절까지 겪었던 터라 당연히 주말부부가 되는 것에 대해서 반대가 있었고 그 마음에 충분히 동의했다. 나 역시 지금도 아내 없이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 혼자 복직해서 올라가야 하는 것도 무겁지만 정말 제주에 남겠다고 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반문했다. 내가 가족들 모두 데리고 가려하는 이유는 무얼까.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고 계급장을 달고 어떠한 직을 수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이 육아휴직을 썼다. 몇 달을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성장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소령이라고 하는 계급과 그 계급에 상응하는 어떤 직책은 결코 쉬울 리 만무했다. 꽤나 높은 계급만큼 국가와 국민이 부여한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수행하기 위해서 분명 나는 나의 모든 열성을 다해 복무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좋아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전보다 더욱더 스스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려 할 것이다. 가족들도 그런 나를 모두 알고 응원했다. 하지만 반면에 그 말은 가족들에게 자칫 소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육지는 아직도 코로나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오히려 툭하면 n차 파동이 올 것이라며 경고했다. 코로나로부터 너무나 안전했던 우리에게 육지에 올라간다는 것은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는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부분이 걱정되는 것은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네 가족이 함께 사는 것. 아내를 설득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비록 나의 기도가, 나의 꿈이, 나의 미래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의 무엇 때문에 가족들을 동참시키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임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기에 각자가 꿈꿀 수 있는 무언가를 마련하는 것이 차라리 가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제주도에 대해 가족 구성원이 느끼고 있던 것들은 모두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또한 곧 끝날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것은 함께 느끼고 있었다.


매번 새로움의 연속을 느끼는 아이들. 같은 곳을 여러 번 가도 지루해하는 법이 없다. 그 와중에 딸아이는 관찰력이 뛰어나 기록을 남기려 하고 아들내미는... 돼지야 미안해.


아직 우리는 여름 한가운데에 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이런 고민은 혼자만 간직하기로 한다. 아직은 조금 더 즐길 때고 여유를 좀 부려도 된다. 아내와도 아이들과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다만 시작할 때 이것이 분명 끝이 있는 시작임을 알렸고 모두가 동의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약속이 무뎌진 것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제는 그 누구도 끝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다. 아내 역시 가족이 모두 함께 사는 것에 대해 분명한 신념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생활이 끝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길 꺼려한다고 느낀다. 그렇게 제주를 마음껏 즐겨주는 아내가 너무 고맙고 좋았다. 남편의 선택과 계획,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 모두를 존경해주는 아내가 사랑스럽다.


장교라는 소명을 가지고 십여 년을 살다 보니 매번 앞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버릇처럼 돼버렸다. 너무 서두르는 나의 모습에 직업병처럼 느껴져 한편으로는 헛웃음이 나온다. 여름 한복판에서 문득 이 고민의 덧없음을 느끼고 마음속에 고이 접어 넣어버린다. 이것을 꺼내야 할 때 우리의 마음과 상황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른다. 다만, 지난 시간 제주에서 함께 지내며 10년 전 아내에게 했던 약속이 떠오른다. 제주에서 집을 짓고 살겠다는 그 약속이 여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아른거린다.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눈부신 기억인지라 형태를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은 내 앞에 존재했고, 빛을 내고 있었으며,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 주었다. 제주에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이 아빠를 또 부르는 소리에 마당으로 뛰어나간다. 까르르 웃어대는 딸아이의 숨넘어가는 웃음소리가 제주 하늘에 울려 퍼진다. 우리 가족 모두가 그 소리에 맞춰 너도나도 너털웃음을 허공에 내뱉는다.


2층에 가만히 거꾸로 누워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선명하게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는 해를 볼 수 있다. 흘러가는 나의 추상적 시간이 시각적으로 비치는 이 공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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