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맞이하는 첫 가을 풍경
* 집 앞 후박나무와 야자수 나무는 상록수다. 항시 푸른 모습만 간직하고 있기에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제주어로 가을은 아래아자를 써서 고슬, 고실, 고을 등으로 표현한다. 아래아의 제대로 된 발음은 쉽지 않지만 오와 아 소리의 중간인데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라서 소리를 제대로 낼 줄 모른다. 특히 몸국...(뫔국?)
신나고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주에서의 여름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나에게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랐지만 그럴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게 마련이다. 복직을 코앞에 두고 이제는 아빠 없이 이 너른 마당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지막까지 좋은 추억을 남기고자 가족들과 여기저기 많이도 다녔다. 문득 딸아이가 묻는다. "아빠 가을인데 왜 제주도엔 단풍잎이 없어?"
이제 가을의 문턱에 막 들어선 데다가 가을은 북쪽부터 오기 때문에 제주의 가을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맨 마지막에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작년 겨울 무렵 왔을 때도 단풍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보이는 주된 식종 중 단풍나무가 없었고 은행나무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제주도의 단풍은 대다수 한라산에 분포해있었다. 바닷가 근처에 사는 우리로서는 올 가을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단풍 구경이 아무래도 어렵겠구나 싶었다. 먼발치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중산간 쪽 변해가는 어렴풋한 색깔을 통해 가을이라는 계절이 여기에 잠시 들르고 있구나 알지 싶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도 가을 경치는 일품이다. 봄에는 꽃구경, 여름에는 시원함을 찾아 계곡으로 바다로 간다면 역시 가을은 단풍 구경이다. 오색찬란하게 변해가는 나뭇잎의 색깔을 통해서 이 계절의 손길이 여기저기 닿고 있구나 느낄 때면 정말 아름답고 신비하고 황홀하기까지 하다. 제주 생활 이제 1년 차를 하고 있는 제주 초보자들은 사실 계절의 단조로움이 제주의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라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겨울의 혹독함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늘상 좋은 날씨와 푸르름이 가득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 주변에 가을 오름의 여왕이라고 하는 따라비 오름이 있어서 제주만의 가을을 느낄 수 있겠거니 했다.
장모님은 가을을 참 좋아하신다. 산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단순히 산행뿐 아니라 눈요기까지 할 수 있는 가을이 등산하기 참 좋은 계절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 장모님한테 어쩌면 제주도는 매력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을 앞두고는 단풍 구경을 육지 이리저리로 하시는 장모님께 제주도에 놀러 오시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모든 마음은 복직을 앞둔 나의 조급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단풍은 10월 ~ 11월이나 되어야 보일 텐데. 아직 9월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으니. 딸아이에게 가을이 이르다고 말해주기보다는 제주도가 그렇다고 말해주는 나를 보며 그건 제주도 탓이 아니라 조급한 아빠 마음 탓이라고 뒤늦게 정정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여름은 내 생애 가장 빛나는 여름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젊은 시절 대다수 여름은 뜨거운 햇볕 아래 땀에 절은 전투복 안에서 지냈기 때문에 모처럼 보내는 이 여유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또 다른 영역에서 의미 있었다. 여름 막바지에 배운 통발 문어잡이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사장님을 따라 썰물 때 미쳐 못 빠져나가고 웅덩이에 갇힌 멸치를 잡는 재미도 한껏 맛보았다. 가을의 문턱에 있는 제주 하늘은 붉은 노을이 환상적이었다. 제주의 하늘은 산으로 가려지지 않고 바다까지 탁 트여 석양의 끄트머리를 볼 수 있어서 좋아한다. 완벽하게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시간의 변화를 색으로 나타낸 자연의 완벽한 시각화 데이터에 감동하곤 한다.
아이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며 제주에서의 삶에 소감을 묻고 나눴다. 아이들은 이런 얘기가 나오면 떠나지 않겠노라 작정을 하고 답을 한다. 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제주도로 완전히 이주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기정 사실화된 상태인 듯하다. 전혀 떠날 마음이 없는 아이들은 제주의 경치가 좋고, 제주의 바다가 좋고, 한라산도 좋고, 강아지도 좋고, 마당도 좋고... 아무렴 다 좋단다. 제주에 있어서 이렇게 넉넉해지나 보다. 따라비 오름을 다녀오는 길에 좁은 시골길에 마주오는 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아 정면충돌의 위협을 느껴 핸들을 꺾어 길이 아닌 곳으로 빠져버린 경험을 했다. 펑 소리와 함께 타이어가 완전히 펑크가 났다. 타이어 교체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 와중에도 우리 가족들은 하하 너털웃음을 지었다. 생전 이런 경험도 처음이고 아빠의 순발력 덕분에 사고가 안 나서 좋단다. 렉카에 끌려가는 차를 보며 좁은 트럭에 몸을 싣고 가는 것도 재밌단다.
우리 가족이 제주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내는 참으로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제주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 시간이 너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야 한다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각오가 너무 결연해 보여 정작 복직을 앞두고 흔들리는 나보다 더 군인정신이 충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랑하는 제주를 떠날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8월부로 완전히 퇴직하신 엄마한테 제주에서 나와야 하는 11월까지 나 대신 우리 가족을 돌봐줄 수 있겠느냐 여쭤봤다. 엄마도 퇴직하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길 원하셨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함께 사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닌데 모두 좋은 마음으로 함께 지내준다는 게 참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결정에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도 많이 들었다.
9월의 제주. 가을의 문턱이라고 하지만 제주에서의 9월은 가을의 문턱이라기보다는 여름의 끝자락에 가까웠다. 단풍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거고 단풍이 오기 전 아빠는 떠나야 한다. 아직 마당의 잔디는 푸르르다. 그저 석양만이 그나마 조금 가을 티를 내는 것 같다. 어쩌면 제주 하늘은 항상 그대로였을 뿐인데 아빠의 마음이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한 달을 잘 보내보고자 이리저리 계획표도 만들어보고 가족 토의도 해본다. 집중이 되질 않는다. 다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우리가 정말 제주와 이렇게 끝이 나는 걸까? 이렇게 칼로 두부 자르듯 제주와 우리가 분리된다고?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마치 그 끝은 없는 것처럼 제주와 어우러져 보자 다짐한다.
"딸아! 제주의 단풍보다 오색찬란한 너희들의 마음이 여름내 영글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