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메밀은 우리나라 메밀 생산의 90%를 차지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세대인지라 봉평 메밀이 최고인지 철석같이 믿고 살았는데 심지어 봉평에서 파는 메밀도 제주산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충격.
대망의 복직 날이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부임지가 정해지지 않아 모든 것이 그저 유동적이기만 했다. 가족들과 오랜 상의 끝에 내린 결론은 전원주택에서 계속 사는 것. 아내와 채비를 하여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육지로 올라왔다. 조금 일찍 올라온 것은 전원주택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부임지가 정해지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코로나가 극성인 육지에서 마음껏 놀 수도 없어 그저 아내와 오래간만에 단둘이 보내는 시간에 만족해하며 복직을 위한 준비를 했다. 아직도 이삿짐은 대전에 있었고 집도 없는 불안함 속에 있었다. 육지에서 아내와 손잡고 걸으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아내의 생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 건 아닐까 느낀 건 그때쯤이었다. 제주도에서 지내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복직을 코앞에 두고서야 부임지가 결정됐다. 왜관. 생각지도 못한 지역이었다. 왜관은 사관학교 시절 한국전쟁에 대해서 배우면서 수도 없이 들어봐서 익숙한 지명이었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그저 동대구에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을 때 낙동강 철교를 지나며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왜관에 도대체 어떻게 전원주택을 구하지라는 고민도 고민이었지만 같이 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아내는 먼저 제주도로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결정된바 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섭리에 맡겨진바였다. 복직을 하자마자 긴 휴가를 나올 수 있어서 제주도를 오가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꾸준히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11월 말쯤 긴 휴가를 끝으로 제주도길은 막혔다. 3차 코로나 파동으로 인해 확진자가 급증하며 육군에서 모든 휴가를 통제했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기억. 앞으로 언제 서울을 또 가보게 될까.
그나마 엄마가 내려가 계셔서 아내가 자유로운 상태인지라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육지를 오갔다. 왜관의 군인아파트는 15평 정도의 좁은 아파트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전에서 이사를 하고 짐을 욱여넣었지만 발 디딜 틈도 없는 좁은 공간 속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결코 정신건강에 좋을 리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들과 생이별하였지만 어쩌다 한 번씩 오는 아내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아내와 둘이 이 좁은 공간에 앉아있노라면(코로나 때문에 바깥 식당에서 식사도 안되어 거의 24시간을 집에서만 있었다.) 이렇게까지 육지에 아등바등 올라와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내가 제주도에 1년 정도만 더 있어볼까?라고 운을 띄웠다. 아내의 결정이 놀랍기도 반갑기도 걱정되기도 했다.
이 무렵 진중문고로 꺼내 읽은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이 나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내가 꿈꾸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처한 환경 속에서 나와 같은 방식의 삶은 듣도 보도 못했다. 제주 해군기지에 근무하는 해군이 아닌 육군 장교가 전방에서 근무하는 동안(왜관에서는 1년만 근무하고 전방으로 가야 했기에) 가족들이 제주도에 사는 것도 들어본 적 없으며, 애초에 군사교육과정을 끝내고 육아휴직을 쓴 사례도 별로 들은 바 없고, 그 와중에 제주도에서 1년 살이를 했다는 얘기는 들은 바가 더욱더 없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해낸 우리 가족들만의 방식이었기에 그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시도한 다는 것은 손전등 없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야 하는 것과 진배없다. 하지만 이내 적응시를 지나면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간상세포를 통한 윤곽이 보일 것이다. 그 윤곽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이런 풍경을 앞으로도 계속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아름다운 섬 제주. 제주는 주홍빛(오렌지)과 참 잘 어울린다.
아내에게 본격적으로 내 삶의 비전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비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지난 1년 간 고민했기 때문에 막힘없이 설명했다. 아내가 의중이 없을 때 설득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의중이 분명히 있음을 알았다면 아내에게 확신을 주는 남편이고 싶었다. 확신을 주기 위한 나의 설명에 아내 역시 금세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워낙 확고한 사람이다. 그렇게 나를 존경하고 믿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더해서 지난 1년 간의 제주에서의 삶이 아내에게도 너무 좋은 기억이었기에 이렇게 결정할 수 있었으리라. 부모님들께 우리의 생각을 들려드렸다. 다만 제주에 완전히 정착할지 아니면 1년만 더 살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터라 1년을 더 지내볼 요량으로 사장님께도 1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몇 차례의 설득과 부탁 끝에 6개월 정도의 연장을 허락받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6개월 동안 미래의 삶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꿈을 건축해 나가기로 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다. 공동체에 관한 한 분명한 비전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확고부동한 공동체는 교회 가족뿐이었고 이렇게 관광지인 타운하우스에 산다면 앞으로의 이웃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공동체와는 다를 것이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여러 시나리오와 그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 가운데 생각하지 못했던 몇 가지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했다.
장인어른은 안산시 공무원이셨다. 오랜 기간 공직에 계셨고 성실하게 일하셨지만 성실함이 때로는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건강이 안 좋아지셨고 결국 병상에 계시다가 일찍 돌아가셨다. 레바논에서 돌아와서 미국에 여행 가려고 비행기표며 디즈니월드 표며 예약해놓은 모든 것을 취소해야 했고 위약금도 상당히 물었지만 마지막까지 장인어른 옆을 지키기 위해 포기했던 그 시간들이 아깝지 않다. 장모님은 그렇게 홀로 되셨다. 장모님은 상대적으로 연금 혜택이 충분하셔서 혼자서도 잘 사실 테지만 건강을 늘 염려하셨다. 우리 엄마 역시 혼자였다. 엄마는 직장에서 예상치 못하게 일찍 퇴직해야 했고 충분한 연금 생활 등을 누리기에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 아들로서 엄마를 챙기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또한 사실 예상 못한 부분이었다.
아내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고 또 나누고 또 나눴다. 아내는 현명한 여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 두 어머니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길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양가 두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삶.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일지 모른다고 생각됐다. 과연 가능할까? 아내의 친구들이 꽤나 반대했다고 후에 들었다. 아무도 시도해본 적 없기 때문에 모든 해답은 우리가 찾아야 했다. 아내는 그런 삶이 기대된다고 했다. 놀라운 반응이었다. 사실 이미 나를 대신해 내려가 있는 시어머니에게 오래전부터 엄마라고 부르며 지낼 때부터 아내의 넉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또 함께 사는 것은 다를 텐데 잘 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뻔뻔하기까지 한 아내의 시어머니에 대한 태도와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주는 엄마. 두 사람 모두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제주도에서 1년을 더 지내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로 완전한 이주를 결정하게 됐다. 나와 내 후손은 이제 제주도 사람이 되는 것인가? 제주도민은 최소 3대가 살아야 제주도민으로 인정받는다고 하던데... 내 손자는 이제 제주도민인 걸까? 제주도 사람이 된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와 함께 제주도로 이주하겠다고 결정해주신 두 어머니의 위대한 결정에도 감사와 더불어 존경심이 들었다. 다만 엄마는 아직까지 고민이 많아 확답을 주진 못했다. 엄마의 확답이 없이는 제주도에 살집을 구매해서 정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1년이든 2년이든 연세를 전전해보기로 했다. 모든 시나리오를 열어놨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결책들은 빠르게 마련되었다. 일단 6개월은 코지 타운에서 지내기로.
제주의 봄을 마주할 때마다 벅차오른다. 분홍의 벚꽃과 노랑의 유채꽃이 잘도 어울린다.
2개월여의 시간 동안 휴가가 통제되었다가 다시 휴가가 승인됐다. 그 사이에 우리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방문한 제주는 겨울이었지만 지난겨울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해를 넘겨 2월이었기 때문에 다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제주였다. 겨울과 다르게 봄은 제주가 가장 먼저 맞이한다. 2월은 계절상 겨울 일지 몰라도 제주에게는 봄의 문턱이었기에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우리의 새로운 삶.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삶의 시작이 마당에 핀 붉은 동백꽃처럼 반짝일 것이다. 파란색 PP 박스 7개에 싸 두었던 우리의 짐은 다시 풀어 원위치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알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당과 동화되었다. 새로 오시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코지 타운 사용법'을 주절이 주절이 설명해주는 딸아이가 부쩍 커버린 느낌이다. 제주도에 올 때 불과 5살이었던 작은 아이도 7살이 되었다. 교정이 예쁜 풍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 형님반이 되었다며 한껏 자랑스러운 듯 얘기하는 이 아이도 참 많이 컸구나 느껴진다.
시간이 참 빠르다. 2019년 겨울 배를 타고 남해안의 한기를 뚫고 제주에 왔다. 흐린 날씨였지만 포근함이 느껴지던 제주였다. 어느덧 햇수로 3년이 지나갔다. 2021년의 제주 역시 아름답다. 코로나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여 여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제주지만 그만큼 사랑도 많이 받는 제주다. 이 넓은 땅에 우리 발붙이고 살 장소 하나 없으랴 생각이 드니 제주가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다. 나그네의 삶이 이제는 주인의 삶이 되려 할 때 넓은 아량으로 우리를 받아줄 준비가 된 제주가 고마웠다. 제주와 함께 아이들도 부쩍 컸고 나와 아내도 삶을 바라보는 방향이 부쩍 성장했다. 부부의 삶이 가장 중요했다면 아이들의 삶도 중요하고 주변 이웃들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가 주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더 선한 영향력을 나눠주는 삶을 선택하였다. 그 대상은 첫째가 아이들이고 둘째가 어머니들이 되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빼꼼히 얼굴을 기웃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의 미래를 들여다보려는 제주의 봄이 따스하게 느껴져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가 되고 신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다르게 살기로 했다.
왔던 길도 돌아가 보면 다른 풍경이 보인다. 삼달리길에 벚꽃이 폈을 때 몇 번이고 오가며 아름다운 풍경을 곱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