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거 여자도 할 수 있어?

딸아이의 파도타기 도전

by 제주 아빠


KakaoTalk_20210209_224811856.jpg 아이의 서핑에 대한 열망이 시작된 그 어느 날. 날이 좋아서. 파도가 좋아서. 보드의 핑크 색깔이 예뻐 보여서 모든 것이 좋았다.


9살인 딸아이가 보기에 세상은 불공평한가 보다. 자신이 가진 세계에서 소위 성공한 상당수 사람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것에 의아함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아내와 나는 딸아이와 아들에게 결코 '성 역할 고정관념'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교육이나 말을 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아이가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게 보일 정도인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무모하다 싶은 도전을 하곤 한다. 마치 자기가 그 유리천장을 깨어 보겠다는 것처럼. 여름날 제주도에서 즐길 수 있는 스포츠 중 단연 최고는 서핑이 아닐까 싶다. 딸아이의 눈에도 그것은 멋져 보였지만 바닷가에서 본 서퍼들의 상당수는 남자였기에 여자는 하는 사람 없냐고 몇 번을 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자 서퍼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여주고 나서야 안심한 듯했다. 그리고 자신도 서핑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9살 아이에게 서핑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아빠도 많지 않으리라. 아이가 그렇게 도전의 말을 꺼낸 게 참 감사했다. 당장에 엄빠는 서핑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웹 서핑했다. 집에서 가까운 표선해수욕장이나 소금막 해변도 서퍼들에게 유명한 곳이었지만 월정리 해변이 초심자 서퍼들에게는 최고의 장소로 꼽혔다. 몇 차례 월정리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하면서 탐색해본 결과 월정리 청소년 서핑 센터를 발견했다. 아쉽게도 월정리 청소년에게만 무료이고 신천리 아이인 딸아이는 돈을 내고 배워야 했다. 하지만 다른 일반 사설업체보다는 가격이 월등히 저렴했기에 선택했다. 정확히는 딸아이가 텐트에 가서 물어보고 엄빠의 허락과 돈을 지불해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열심히 설명해줬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으면, 방법부터 스스로 찾도록'하는 우리의 훈육 방식이 잘 통했다고 생각되어 흔쾌히 약속을 잡고 서핑 교습을 시작했다.


20200707_130043.jpg 하필 교습 날 날이 흐렸다. 비를 살짝 뿌리기도 했지만 딸아이의 서핑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신스틸러가 될 딸의 서핑 슈트 착용샷


의외로 초보자들이 타는 서핑을 여러 번의 강습이 필요 없었다. 그러니까 솔직히 생각보다 쉬웠다. 패들링이 좀 어렵긴 했지만 사실 딸아이는 패들링 자체를 잘할 수 없었다. 팔이 짧아서. 어차피 아빠가 매번 밀어주면서 할 거라 딸아이는 그저 잘 서있으면 됐다. 게다가 9피트 보드는 9살 아이 한 명은 거뜬히 떠받칠 수 있는 부력을 가졌기에 중심을 잡는 것조차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국 그날 교습 간 딸아이는 단연코 최우수 학생이었다. 귀엽다며 같이 배운 서퍼들이 같이 사진 찍자고 줄 섰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내가 봐도 귀여웠다. 그런 자신이 뿌듯했는지 딸아이도 연신 포즈를 취해주며 한껏 높아진 인기를 즐겼다.


KakaoTalk_20210209_224700028_13.jpg 아이가 가장 어려워한 자세. 강사님이 아빠는 얼굴 잘라버리고 아이만 귀엽다고 이렇게 찍어주셨다.


KakaoTalk_20210209_224700028_16.jpg 배우는데 진심인 아이. 정말 진지하게 임했다. 자세와 표정 모두가 단연 클래스 내 압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상 훈련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꽤나 힘도 들어갔고 '레디' 자세에서 팔로 몸을 지탱하는 것은 보통의 그 나이 여자아이들이 경험해보지 않은 자세기 때문에 다소 어려워하기도 했다. '업' 자세에서 한 번에 일어나는 것 역시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상 연습할 때 조금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네가 선택해서 배우게 해주는 것이니까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자라고 다독여서 끝내 지상 연습을 잘 수료했다. 본격적으로 파도에 몸을 맡기러 갔을 땐 아빠와 외삼촌이 모두 신나서 딸, 조카와 함께 했다. 아빠나 삼촌이나 딸(혹은 조카)을 너무 예뻐한 데다가 잘하는 모습을 보니까 더욱 신이 났다.


KakaoTalk_20210209_224700028_02.jpg 삼촌의 조카 사랑 덕분에 더 즐거웠던 첫 서핑 교습


팔이 짧아 잘 되지 않는 패들링을 열심히 해가며 엎드린 채 보드에 균형을 잡고 잘 있었다. 균형이랄 것도 사실 없지만 그래도 배운 대로 가운데에 꼭 맞춰 있으려고 "아빠 나 이거 맞아?"라고 연신 물어봤다. 조금은 완벽주의자적 기질이 있는 아이 인터라 잘하고 싶어 안달이고, 맞게 하고 싶어 안달이었고 그 마음이 기특해서 교정해주면서 더욱 완벽한 자세가 되도록 도와줬다. 그렇게 강사님이 있는 곳까지 열심히 보드를 끌고 가서 대망의 첫 도전을 하게 됐다. 바닷물이 꽤나 깊었지만 아이가 허우적거릴 정도는 아니었고 래쉬라고 하는 끈이 보드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빠져도 보드만 잡으면 큰 문제는 없었다. 게다가 시작 지점은 그랬어도 도착 지점은 거의 해변가 앞이었기 때문에 안전했다. 그래도 아빠와 삼촌이 역할을 분담해서 강사님께 데려다주는 사람, 해변에서 아이가 오는 방향에 맞춰 기다렸다 건져주는 역할을 맡았다.


KakaoTalk_20210209_224700028_05.jpg 동생은 아직 도전하기에 일러! 하지만 호기심 가득한 동생은 누나가 하는 것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물에 안 들어가겠지 하고 저렇게 입혀갔지만 물에 빠진 생쥐가 된 건 당연지사.


아이의 첫 도전은 보기 좋게 실패였다. 겁먹은 게 분명했다. 잘 섰는데 뛰어내렸다. 속도감을 견디지 못했으리라. 그 모습이 사실 더 아이다워 좋았다. 첨부터 잘하는 것도 좋겠지만 한 번쯤 물에 빠져봐야 물에 대한 공포심도 이겨내리라. 다행히 아이는 그 도전에 겁을 먹거나 실패감을 느끼기보다는 건져지자마자 다시 해보겠다고 했다. 아이고 기특해라. 누구 딸 인교? ^^ 그렇게 다시 끌고 가면서 연신 아빠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겁먹지 말고 뛰어내릴 필요 없어. 파도에 몸을 맡겨. 그냥 서 있으면 돼. 누가 들으면 아빠는 서퍼 경력 10년 차는 돼보였겠다. 사실 방금 같이 지상훈련 수료한 동급생인데.


이후에도 실패와 성공을 반복했다. 물에 빠지면 연신 얼굴을 닦아내느라 정신없지만 겁먹지 않고 다시 보드에 올라타길 반복한다. 이쯤에선 아빠랑 삼촌은 사실 자기들 타느라 정신없었다.


두 번째 도전에서 아이는 수면 위를 날아 먹이를 낚아채는 한 마리의 갈매기 같았다. 자세도 지상훈련 때와 동일한 자세를 취하며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주욱 해변까지 밀려나가 보드의 바닥이 모래톱에 닿아 멈출 때까지 서있었다. 모두가 환호성을 질러주었다. 어린 나이에 서핑 도전과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자기 키의 두세 배는 되는 보드에 서있는 사진 같이 찍어주는 캐릭터가 아니라 서핑을 정말 잘하는 미래의 전설의 서퍼가 될 영재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해냈다며 어느새 해변가에 나와 그 아이의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있던 엄마에게 자랑하고 아빠한테 자랑했다. 기특한 아이.


최고의 순간이었지만 동영상이 짧았던 게 아쉽다. 엄마는 저런 딸아이가 기특해서 연신 휴대폰의 녹화 버튼을 눌러댔다.


그 순간 딸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배우면서도 학생 중에 남자가 많은지 여자가 많은지 지켜보고 숫자를 셌다. 항상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성공하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갖는 아이기에 어찌 보면 너무 예민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여자였다면 정말 그게 궁금했을 수도 있겠다. 마치 올림픽에서 한국 사람이 금메달을 제일 많이 땄는지 궁금해한다거나 그다음엔 아시아인이 최초로 무엇을 했다는 기사에 눈이 간다거나 하는 집단성처럼 딸아이에겐 여성이라는 집단성이 있던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이 '여자 아이'라는 것에 더 자부심을 느낀 듯했다. 그렇게 딸아이의 도전은 유리 천장을 깨기 위한 작은 첫걸음이었을지 모르겠다.


보드를 샀다. 딸아이를 응원하기 위해 그 길로 가서 보드와 소프트 랙(자동차 위에 보드를 얹고 결박해서 고정시키는 장치)을 질렀다. 당근 마켓 덕분에 괜찮은 가격에 구매했다. 딸아이와 틈나면 트위지에 얹고 소금막 해변으로 보드를 타러 갔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소금막 해변의 바다 색깔 때문에 그곳에서는 보드를 월정리에서 만큼 신나게 타려 하지 않았다. 월정리 바다색이 아무래도 더 안심되는 색깔이었다는데 동의한다. 어쩌면 도전 자체가 중요한 이슈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해보겠다고 했고 그것을 이뤄냈으니 됐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상상과는 달랐을 수도. 월정리로 보드 타러 가자는 말은 그래도 종종 했다. 월정리까지 보드를 싣고 가기가 쉽지 않아서 자주는 못 데려가 줬다.


20200908_112202.jpg 올여름 우리와 함께 바다를 누볐던 그 보드. 이마트에서 파는 8피트 정도의 보드랑 정이 많이 들었었다.


조금 뒤늦게 시작한 보드 시즌이었기 때문에 금방 끝났다. 더 많이 탔으면 하는 아빠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딸아이는 너무나도 충분히 탔다고 한다. 딸을 위해서 산 보드는 아빠가 더 많이 탔다. 몸이 찌뿌둥한 날엔 아침부터 가서 신나게 보드를 타곤 했다. 소금막 해변의 파도가 조금 더 세서 아빠한테는 그곳이 더 맞았다. 딸아이는 올여름 어떤 마음이었을까? 보드 타는 게 정말 재밌었다고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 뒤에 더 많은 의미의 무엇인가가 있어 보였다. '서핑 보드'하면 왠지 남성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상의 부분은 지퍼를 벗어 내려 구릿빛 피부와 매끈하고 적당한 굴곡의 근육을 가진 남성이 기다란 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머리에 묻은 바닷물을 털어내며 해변으로 올라오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서핑 보드이고 서퍼일 것이다.


하지만 짜리 몽땅한 키에 양갈래로 묶은 머리, 다 빠진 앞니지만 햇빛만큼이나 눈부시게 활짝 웃는 까무잡잡한 피부, 볼록 나온 배에 혼자서 들 수 없는 보드를 낑낑거리며 끌거나 옆에 있는 아빠가 들어줘야 하는 이 어린 여자 아이 서퍼는 그 이미지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이미지(심상)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빠 세계에 있어 보편자로서의 기존의 서퍼 이미지를 딸아이가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제 막 세상의 모든 심상들을 흡수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 아이에겐 그런 구릿빛 근육질 남성의 서퍼 이미지는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자신의 선택에 당당하게 마주하고 남자, 여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도전하는 자로 존재하는 게 중요한 그러한 심상을 남겼을 것이다.


20200717_144201.jpg 뜨거웠던 여름날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해변가로 서핑 보드를 날라줬던 동글이. 소프트 랙과 찰떡궁합이었다. 더 먼 곳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안전을 위해서 참았다.


다음 여름을 기약한다. 제주는 일 년 내내 서핑을 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서핑 슈트를 입어가며 차가운 온도를 견디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하루 입어본 서핑 슈트 이후엔 핑크색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민트색의 수영복 서퍼로 줄곧 지냈기에 뜨거운 여름이 적당하다. 서핑 꿈나무는 최고가 되길 원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길 원한다. 그렇기에 서핑 시즌이 끝났다고 해서 아쉬워하지 않는다. 또 여름은 올 것이고 아직 그 아이가 해볼 수 있는 도전은 많다.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딸아이는 또 묻는다. "여자는 없어?" 아빠는 답한다. "그거 여자도 할 수 있어."


1 (1).jpg 아이의 서핑 시즌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해조류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소금막 해변은 조금 무서웠나 보다. 하지만 서핑을 하고 싶다는 열정까지는 아직 식지 않고 잔불로 남아 있으리라.


DJI_0857.jpg 아이는 저 넓은 바다 끄트머리에서 자신이 보드 위에 서있던 그 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딸바보 아빠의 욕심은 이제 반대쪽을 향해서 더 큰 도전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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