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아빠는 도깨비방망이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by 제주 아빠


"아빠 수영장 만들어주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엄마 뱃속에 10개월 동안 있으면서 충분히 물놀이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부족했나 보다. 물을 이렇게 좋아하는 아이들도 흔치 않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물놀이를 하고 싶어 하고 한 번 물에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른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이 너른 마당에서의 수영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 어디서 본건 있어서 마당에 수영장 딸린 집을 9세, 6세 아이들이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도깨비방망이 아빠는 아이들이 요구하면 뚝딱 해내야 된다. 아이들의 세계는 무한한데 거기에서도 최고의 능력자는 아빠이게 마련이다. 슈퍼맨, 맥가이버... 이런 게 아빠인데 동양식으로 생각한다면 영락없는 도깨비방망이다. 봄의 제주는 날씨가 때론 여름 같다가도 금세 추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은 아니라고 몇 번을 말렸는지 모른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찾아오고 슬슬 수영장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는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당에 땅을 파서 수영장을 만드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당근 마켓에서 인텍스 수영장을 구매할 요량으로 이즈음부터 열심히 눈팅을 해뒀다. 수입 가격 자체가 많이 떨어진 터라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가격에 구할 수 있었기에 큼직한 수영장을 구매하기로 했다. 앞집 심심 타운에는 아이들용 작은 인텍스 수영장이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그 정도로 성이 찰리 만무하고 적당한 것 샀다가는 시시하다고 할게 뻔해서 거대한 수영장을 사려고 했는데 설치 장소, 물 수급 문제 등을 고려하여 3미터 정도가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며칠을 눈팅한 결과 아주 괜찮은 가격의 인텍스 수영장을 물었다. 제주시까지 가서 수영장을 구매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더 신났단 건 공공연한 비밀.


20200908_112629.jpg 사실 조립을 시작하는 사진이 아니고 해체한 사진이다. 낙엽이 보이는 것처럼 이 사진이 찍힐 시점은 이제 가을에 접어들어 올여름 시즌 종료.


무더위 땡볕 아래 수영장을 조립하려니 녹록지는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설치가 쉽지도 않다. 부품도 많고 힘도 들고 아빠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수영장 설치. 육아휴직 아빠라 다행이다 싶었다. 사장님은 잔디가 죽으니 잔디 위에 설치하지 말라고 하셨고 앞마당과 뒷마당이 연결되는 지점에 잔디가 많이 없어 그곳에 설치할까 하다가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뒷마당에 설치하자니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추울 것 같고 앞마당은 잔디 때문에 안되고 이래 저래 고민이 많았다. 설치하고 청소하는 것도 일이었다. 쉽게 생각했는데 정말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한테 인기 있는 아빠 되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되지. 아빠 혼자 인텍스 수영장 설치, 청소, 관리. "되는데요?"


5.png 되는데요? 24인용 텐트까진 혼자 무리지만 까짓것 인텍스 수영장쯤이야.


파란빛 수영장을 보자 아이들은 이미 흥분하기 시작했다. 청소하려고 발목 정도까지 받아놓은 물을 보고는 온 동네 아이들이 미꾸라지들 마냥 뛰어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그래 그렇게 좋으면 됐지. 그냥 그러고 놀아라. 장소를 잡기까지 그냥 뒀다. 그 사이 물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방법, 벌레 구덩이가 되지 않게 하는 방법 등을 열심히 유튜브에서,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인텍스 수영장 중고를 구매한 가격은 고작 3만 원이다. 원래는 더 비쌌는데 부속품 중 작은 나사 하나가 부러져있는 것을 구매해서 집에 온 후 설치하다가 알았다. 친절한 판매자님께서 돈 일부를 돌려주셨다. 하지만 벌레 잡이용 뜰채, 물 정화 펌프, 물 소독제 등을 구매하는데 돈이 갑절은 들은 것 같다. 하지만 기왕에 할거 제대로 구비해놔야지 물을 한 번 받고 오래 쓸 수 있으니까 물값 아낄 거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20200620_183611.jpg 안성맞춤인 테라스. 수영장을 설치하고, 청소하고, 물을 받는다. 사실 이내 깨달은 것은 위치가 반대로 설치됐다는 사실이다. 결국 물을 빼고 다시 반대로 돌리는데 꽤나 고생했다.


드디어 장소를 정했다. 아내랑 열심히 상의한 결과 굳이 마당이 아니라 테라스에 올려도 되겠다고 생각했고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것은 너무나 귀찮은 일이라 아내의 도움으로 수영장을 통째로 들어 테라스로 올렸다. 줄자로 미리 재본지라 사이즈는 정말 칼같이 맞았다. 마치 이 테라스는 처음부터 3미터짜리 인텍스 수영장을 놓기 위해 설계되었나 싶을 정도였다. 수영장 개시가 가까워졌다. 다시 한번 수영장을 벅벅 문질러 닦은 후 물을 받기 시작했다. 사장님의 조언에 따라 지하수용 수전으로 물을 받았다. 물값이 거의 들지 않는다고 한다.(그걸 이제야 알려주시다니...) 받는 도중에 물이 너무 차갑다고 느꼈다. '이 정도면 수영 못할 텐데...' 걱정이 앞섰다. 작은 아이는 물이 조금만 차도 덜덜덜 떨고 입술이 파래지고 하지만 하고 싶어서 짜증을 내고... 수영장 사주고 열심히 설치해줬는데 괜히 작은애한테 당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무렵 물을 받는 등이 따가울 정도의 뜨거운 제주의 햇살이 나를 살렸다.


오전에 물을 받아두면 오후엔 물이 따뜻해졌다. 태양열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태양열만 잘 이용하면 물을 데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한번 데워진 물은 날씨가 많이 흐리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다면 꽤나 적당한 온도를 유지했다. 이것이 제주의 여름이구나! 그렇게 수영장 물을 받고 적당한 온도를 만들고 햇빛이 뜨거웠던 어느 여름날 '코지 타운 3동 아빠표 인텍스 수영장 3m'가 개장했다. 물에 제일 먼저 뛰어든 건 물 받고 정화하느라 온몸이 땀에 젖은 아빠였다. '오 이거 괜찮은데?' 수영장이 개장하자 온 동네 꼬마들이 우리 집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겐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에서 안도했다. 이렇게까지 좋을까.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수영장 물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20200630_092446.jpg 매일 날씨가 이러니 수영장 물이 따뜻해지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너무 더운 날은 표면의 물은 뜨거워질 정도였고 호스에서 나오는 첫 물은 정말 펄펄 끓는 수준이었다.


엄마는 그런 아이들을 위해 부지런히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피자, 치킨과 같은 배달음식도 열심히 날랐고, 직접 요리한 맛있는 음식들도 날랐다. 백미는 역시 바비큐다. 동네 사람들 다 불러 모아 바비큐를 먹고 고기 굽다 물속으로 뛰어들고를(하지만 금세 물에 기름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반복했다. 아이들도 나올 줄을 몰랐다. 밤이 되어도 물이 꽤나 미지근하게 유지됐기 때문에 물속에 있으면 오히려 따뜻하다고 느껴서인지 더욱 나올 줄을 몰랐다. 물에서 아이들을 건져낼 수 있는 것은 더러 개구진 남자아이들의 횡포뿐이었다. 어느 순간 이에 질세라 여자아이들이 대응하기 시작했고 과열되기 일쑤였다. 흥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나에겐 음악처럼 들렸다. 수영장 설치를 위해 고생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아빠는 위대하다.'


수영장은 어른들에게도 안성맞춤이었다. 튜브 위에 올라타 작렬하는 여름 햇빛을 피하기 위해 얼굴만 밀짚모자로 가린 채 무념무상으로 누워있노라면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싶은 마음이었다. 졸졸거리며 간헐적으로 들리는 정화 펌프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만이 현실과 꿈을 구분 짓는 증거가 될 뿐이었다. 아내도 이런 수영장을 참 좋아해 주었다. 초등학교 간식 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아내는 아이들에게 치여 열심히 일하고 집에 오면 그 길로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온 가족이 수영장에서 물장구치고 노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그렇게 튀어나간 물에 수영장의 깊이가 얕아질수록 우리의 가족애는 더욱 깊어졌다.


20200616_123959.jpg 사실 아이들에겐 신라호텔 수영장이 최고다. 도저히 이길 수 없지만. 그래도 가성비, 가심비 최고는 아빠다. 신라호텔 이부진 사장님이 엄마가 아닌 이상 이 정도면 최고 아닌가?


아빠도 칭찬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자꾸 묻곤 한다. "수영장 좋아?", "바다가 좋아 수영장이 좋아?" 대다수 질문에 아이들은 아빠 최고라고 답한다. 하지만 신라호텔 수영장보다 좋냐는 질문엔 차마 답하지 못한다. 솔직한 녀석들. 아내의 생일을 맞이하여 방문했던 신라호텔 수영장은 아이들에게는 세계 최고의 수영장이었으리라. 게다가 짬뽕이 정말 맛있었다. 나도 인정. 신라호텔 수영장은 짬뽕 먹으러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 하지만 고맙게도 아이들이 신라호텔 수영장 다음으로 아빠 수영장이 좋다고 해준다. 기특한 녀석들. 뿌듯한 아빠는 이 담엔 더 큰 수영장을 설치해봐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수영장을 설치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사람들 특히 서양사람들은 이런 삶이 기본인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할까? 취향이 다른 것일까? 하지만 마당 딸린 집과 수영장은 모두의 워너비가 아니었던가. 신혼여행 중 인터라켄 호수 옆을 지나가는 기차 차창 너머로 본 오후 다섯 시의 스위스 가정집 마당에선 가족 모두가 바비큐에 연신 고기를 구우며 석회질로 색이 탁하지만 오묘한 에메랄드빛으로 잔잔하게 빛나던 인터라켄 호수에 뛰어들고 있었다. 언젠간 나도 그런 삶을 살아야지 했는데 육아휴직으로 찰나일지라도 올여름만큼은 인터라켄 호수의 색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아이들의 미소는 그보다 더 빛나는 이 순간을 이미 살아가고 있다는데 한껏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이 모든 삶을 누리는데 그리 큰돈이 필요하지 않단 것 역시 깨달았다. 마치 마당에 수영장 딸린 집은 재벌 3세나 가능할 것 같고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맘때 본격적으로 제주로의 완전한 이주에 대해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20200702_141240.jpg 아빠 최고를 연신 외쳐주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어 수영장 설치쯤은 별것도 아니라고 느낀다. 다음엔 뭐 해줄까 우리 딸?


여름 한낮의 제주는 조용하다. 매미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았다. 대신 새들의 지저귐과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처얼썩 파도소리가 내가 섬에 있구나라고 느끼게 해 주었다. 아이들이 마당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이내 그 조용함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진다. 하루 종일 웃을 일이 끊이지 않는 이 아이들을 보며 덩달아 신난다. 참 감사하다. 나에게 이런 결정을 할 용기를 준 것도, 이런 직장에서 일할 수 있던 것도, 함께 해준 아내도,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아이들도. 잠잘 때가 되면 하루하루의 이런 시간들이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 재생된다. 이 순간들을 내 세포 하나하나에게 기억시키고자 한다. 이게 끝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앞으로의 삶이 더욱 선명해진다.


도깨비방망이 아빠는 아이들에게 무얼 해줄까 또 고민한다. 아이들에게 이 시간이 끝나지 않게 해 주는 것과 추억을 선물해줘야겠다고 다짐한다. 하나를 더한다면 신앙. 내가 유일하게 남겨줄 수 있는 유산이다. 소탈하지만 꽉 채워서. 아이들은 그런 도깨비방망이 아빠를 보며 같이 놀자고 소리친다. "이 녀석들 아빠 들어가면 각오해~" 네 가족이 3m면 충분하다. 마음의 거리가 0m라서 그런 것 같다. 도깨비방망이 아빠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사방으로 튄 물방울이 제주의 햇빛을 머금어 반짝 빛난다. 그 사이로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덩달아 환하게 빛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이 오후의 찰나의 순간이 순간이 아닌 듯 느리게 지나간다.


이런 건 어디서 봤는지 잘도 따라 한다. 마지막에 물이 튀겨 얼굴을 연신 닦아내는 둘째가 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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