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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Jun 04. 2018

내 안에 이미 있던 수많은 지원군들

휴혼 후 처음으로 제2의 친정 같은 나의 단골 카페 그라티아 숲에 들렀다. 오십 대 카페 사장님과는 1년도 안 된 사이에 꽤나 깊은 인연을 맺었다. 대전으로 이사 갔다는 소식을 미리 전하지 못해 마음에 걸린 터였다. 

카페 앞에 주차를 하고 내리는데 이제 막 카페를 나서는 단골손님과 딱 마주쳤다. 친하진않지만 요리 교실도 함께 참여하고 차도 종종 나눠 마신 사이이다. 집에 일이 생겨서 잠깐 갔다가 다시온다기에 그러려니 하고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 사장님과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덧 일어나봐야 할 시간이다. 사장님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련다 하시며 문 닫을 준비를 주섬주섬 하신다. 그때였다. 아까 그 단골손님이 다시 등장했다. 단골손님이 들고 온 종이 가방을 내게 건넸다. 물음표가 둥둥 뜬 채 종이 가방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말을 잃었다. 밑반찬이었다. 멸치 볶음, 토마토 피클, 파김치, 만두. 이사한 집의 작은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는내게 최고이자 최적의 선물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어린이연필 세트와 샌들, 젤리까지 달려 왔다.아들 선물이다.감격스러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반찬 뚜껑을 열어 바로 맛을 보고, 사진까지 찍었다.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전하고 차에 반찬 통을 실었는데 그 옆에 쌀 포대와 나박김치 통이 이미 실려 있다. 좀 전에 카페 사장님이 챙겨주신 것들이다. 대전으로 내려오는 내내 반찬 통에서는 김치 냄새가 새어 나왔지만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내게 이런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주는 존재.    


휴혼 과정은 내게 잊지 못할 특별한 시간이기도 한데, 내 주변의 ‘WHO’를 발견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WHO》는 2009년 우리나라에 소개됐을 당시 “내 안의 100명의 힘”이라는 부제가 달렸던, 미국 최고의 헤드헌팅 기업 CEO가 쓴 책이다. 사람들은 도움을 청할 때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면, 우리는 구인 사이트를 뒤적거린다.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담당자에게 이력서를 보내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나에게는 이미 100명의 지원군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이유는, 우리가 우정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미 내 안에 있다.
 

휴혼이 이루어지기까지 한 달여의 기간 동안, 나는 단 한 사람의 ‘외부인’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나와 인연을 맺고 나를 잘 아는 이들이 나를 기꺼이 도우려 했다. 도움은 반찬에서부터 집 보증금, 정서적 지원까지 빈틈없이 나를 에워쌌다. ‘WHO’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바로 나의 친구들이다. 

나는 사실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별로 없다. 증권사에 다닐 때 신규 계좌 개설 할당량을 채워야 할 때도, 대출 사기를 맞아 거액의 빚을 졌을 때도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자체가 그들에게 부담이자 민폐라고 생각했다. 친구라는 관계는 언제나 즐겁고 신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공유해야 한다고 믿었다. 심리적으로 기대고 도움을 받을 수 있어도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관계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34년 만에 친구에게 거금을 빌렸다. 100만 원.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빌린 게 아니라 빌려줌을 당했다. 60일 된 신생아를 키우는 친구는 아이 젖을 물리거나 아이를 재우면서도 나랑 통화를 했다. 나의 휴혼과 관련된 히스토리뿐만 아니라 그전의 갈등까지도 모두 아는 친구다. 우리 부부가 전략적 이별을 택한 그 순간부터 매일매일 바뀌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상황을 보니까 집 구할 돈도 못 받을 것 같은데, 혹시 필요하면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고 나한테 말해.”


정말로 그런 상황이 내게 닥쳤고, 그때도 친구는 내가 먼저 말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눈치를 채고“얼마 필요해?”라고 먼저 물어봐준 것이다. 친구는 보증금 외에도 넉넉하게 빌려주려고 했고, 천천히 갚아도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빌리는 모든 돈 역시 빚이고 언젠가 갚아야 할 부담이었다. 이런 속내를 말했음에도 한사코 빌려주려는 친구에게 “진짜 필요할 때 말할 테니까 그때 도와줘”라고 말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강사 친구 Y는 내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돈 모을 필요성을 못 느껴서 버는 족족 쓰고 살았는데, 이번 계기로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필요할 때 쓰라고 떡 하니 친구에게 내줄 수 있는 여력이 없다고 한탄한다. 돈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란다. 별소릴 다 한다는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돈 많이 벌어야겠다” 재차 다짐하는 그녀는, 매번 내게 밥과 차를 산다는 사실은 잊었나 보다. 이 친구가 어느 날은 또 ‘중․고등학교 대상 진로 프로그램’을 기획해보자고 한다. 이 기획안이 본인에게 왔는데 일정이 너무 바쁘고 번거로운 업무가 많은 프로그램이라 망설였다고 한다. 이 상황을 아는 K가 전화를 해서는 “우리 그 프로그램 해요. 시현 강사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는 게 아닌가. “K야, 이미 우리는 시현이에게 많은 정서적 도움을 주고 있단다” 했더니 그래도 실질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우겼단다. 내게 일감을 주기 위해 우리 세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꺼이 맡으려고 하는 그녀들도 WHO이다.   

 

대전에서 혼자 뭐하냐고, 매달 월세 20만 원 지원해줄 테니 서울로 올라오라고 적극 종용한 WHO도 있다.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친구는 “나는 5만원까지 가능”이라고 한다. 


비단 이 친구들뿐이랴. 별 다른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켜봐주는 WHO, 이사한 대전 집에 김이며, 햄이며 식료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WHO, 상황을 판단하는 말에 내가 상처받은 모양새니 “나를 용서해줄래?”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말로 나를 웃긴 WHO, “시현 씨는 반짝반짝해요”라는 말로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WHO, 무작정 귀촌을 알아본 나와 인연이 닿아 일면식도 없는 내게 빈 집 정보부터 먹고 살 수 있는 방법까지 세세히 도움을 준 충남 홍성의 WHO, 진한 피로 이어진 덕분에 누구보다 쓴소리를 했던 WHO, 휴혼을 선언하노라 끄적거린 블로그에 댓글을 달며 응원해준 WHO…….    


어느 날 누군가 내게 그런다. “만약 내가 시현 씨 같은 상황에 처했는데, ‘도와줘’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몇 명이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일례로, 빌려주는 거지만 백만 원을 선뜻 줄 친구가 있는가, 반문해봤는데 없어요, 저는.” 새삼 나의 자산, WHO를 한 명 한 명 떠올려보았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WHO가 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https://bit.ly/2IHNq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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