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드id Apr 18. 2022

보물이 된 학대받던 종이학 2천 마리

'종이학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이 이제야 보인다'


방에 종이학 천 마리가 있다. 아들 방에 마리가 있다. 종이학 이천 마리는 장류를 담았던 듯한 촌스러운 플라스틱 병에 들어있다. 십 수년 지난 이 종이학은 가족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평생 소장해야 할 보물 같은 존재다.


엄마는 일도 공부도 취미생활도 운동도 열심히 했다. 이 중에서도 운동은 나중에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다짐과 같았다. 손가락 운동도 포함됐다. 치매 예방에 좋다는 핑계로 십수 년 전 누나랑 나에게 천 마리씩을 접어 선물해 주셨다.


자식 잘 되라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마음을 종이학 하나하나에 새겨 담았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제대로 눈길 한번 준 적 없기에 존재 자체도 희미했다. 어제 누나한테 종이학 사진을 보내며 물었다.


"누나, 엄마가 종이학 언제 접었는지 기억나?"

"몰라 ㅠㅠ"


우리 남매가 출가할 때 종이학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있는 줄도 몰랐으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식들에게 준 선물이었지만, 수십 년 동안 엄마 집에 덩그러니 남아 거실 한구석을 차지할 뿐이었다.


종이학은 올해 1월에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작년 8월 엄마가 떠났지만 엄마 옷가지를 차마 건드릴 수 없어 그대로 두었다. 올해 초 옷장을 정리했다.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접어 옷상자에 담아두었다.


 옷장 속에 있던 종이학 두 통을 발견했다. 작년에 엄마와 살림을 합칠 때 내가 엄마방 붙박이장 속에 넣어 놓은 듯하다. 관심 없었지만 익숙한 종이학이었다. 촌스러운 빨간, 파란 뚜껑에 담긴 알록달록한 종이학들 눈을 통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엄마가 접어준 종이학


촌스러운 용기에 담긴 종이 덩어리로 여겨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주로 두었던 종이학이다. 예쁜 병에 다시 담을까도 생각했지만, 엄마 마음이 담긴 그대로가 좋을 거 같았다.


내 방로 가져왔다. 왠지 행운을 듬뿍 안겨줄 것 같은 소중한 운이 감았다. 하나는 아들 방에 놓아주니 좋아했다. 종이학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당당하게 내 집에 자리를 잡았다. 수천 가지 몸짓으로 행운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예전에는 엄마의 정성을 헤아리지 못했다. '얼마나 걸렸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의 깊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먼저 헤렸더라면 저렇게 십 년 넘게 내동댕이 쳐놓을 수 있었을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떠난 부모가 선사하는 시간은 민망하고 죄송하 그지없을 때가 많다.


어제저녁에 요가 매트 위에 누워 스트레칭을 하다가 종이학과 눈이 마주쳤다.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엄마의 감정과 마음이 들이다. 한 마리 한 마리 접으며 느꼈을 감정, 자식에게 전할 때의 마음. 거들떠보지도 않던 종이학은 이제 내가 죽을 때 함께 데리고 가야 할 보물이 되었다. 덕분에 끄적끄적 오늘도 글로 엄마를 그려본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라는 피천득 님의 말을 엄마에게 전하고 싶다.


별거 아닌 일상에서 엄마가 남긴 흔적을 따라 엄마를 만나고 엄마의 마음을 한번 더 느고 헤아렸다. 평생 이렇게 하루하루 엄마를 떠올리며 추억하고 고마워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는 종이학을 타고 훨훨 날아 아픔 없는 곳으로 떠났다. 더이상 눈을 마주하고 마음을 전할 수는 없지만, 뒤늦게나마 엄마의 마음을 하나라도 더 떠올릴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