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내달리는 도로의 가로수에 새싹이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맑은 연둣빛을 뽐내며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하루가 다르게 싱그럽게 변해가는 자연을 바라보며 생명력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도 오늘도 시간은 아무 거리낌이 없다. 눈치도 보지 않고 잘도 흐른다. 어쩌면 시간은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는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혹독한 겨울을 난 가지에서 씩씩하게 새싹이 피어나듯 엄마도 냉혹한 시련을 견디고 싱그러운 미소를 되찾았으면 좋겠다.
주말마다 아이들과 엄마집으로 출동한다. 아이들은 TV도 실컷 볼 수 있어 좋고, 나는 엄마를 곁에서 실컷 볼 수 있어서 좋다. 특별하게 엄마를 챙기는 건 없다. 같이 밥 먹고 얘기하다 보면 엄마는 금세 피로를 느낀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방에서 잠을 청한다. 한 공간에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자체가 서로에게위안이다.
주말 동안 수시로녹즙을 짜고, 버섯 가루를탄다. 식단도 주로 맛없는 야채 등 건강식으로준비한다. 온갖 야채를 짜거나 삶는 나날의 연속이다. 엄마는 사약 같다고 말하곤 했다.
가망 없다는 의사 말이 왠지 틀린 것만 같았다. 의학을 뒤로 미룬 채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다. 엄마 혼자 있으면 제대로 챙기지 않으니주말이라도 엄마를 찾아 함께 병마와 싸운다.
운이 좋게 집 문제도 순식간에 해결됐다. 이제 한 달 정도 지나면 엄마와 살림을 합친다. 한데 그 시간이 한없이 길다. 조금 더 빨리 곁에서 엄마와 마주하고 챙기고 싶지만 얽히고설킨 삶의 복잡함은 쉬운 게 하나 없다.
일요일 아침, 기운 없다는 엄마와 산책을 나갔다. 움직여야 암을 이길 수 있다는 말에 의지해 엄마를 이끌었다. 산에 갈 때도 폴대가 필요 없던 엄마였는데 걷는 게 버거운가 보다. 누가 버린 우산을 집어 들고 지팡이 대신 사용을 했다. 지팡이를 주문하고 엄마를 부축했다.
반만 시골틱한 동네를 천천히 한 시간 가량 돌았다. 군데군데 개나리가 피었고, 듬성듬성 피어 화려하지 않은 벚꽃도 여기저기서 봄기운을 풍겼다. 가라앉은 기분을 업 시켜 사진을 찍으며 아들과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는 외진 구석에 핀 초라한 개나리 몇 구루, 볼품없는 벚꽃 나무에도 감동했다. 아마 당신 고생하는 동안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구나 하는 한탄이자 감탄일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푸릇푸릇한 가로수를 보며 생각했다. 맛없는 녹즙, 맛없는 반찬, 힘겨운 산책. 엄마를 위한 일인지, 내 욕심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드시고 싶은 거, 하시고 싶은 거 다 드시게 하는 게 어떠냐는 아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정답이 없기에,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기에, 오늘도 가슴이 뻥 뚫린 마음으로하루를 보냈다.
집에 와서 아들과 엄마와 꽃과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봤다.엄마가 이렇게 꽃에 감동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우리 집테이블 위 꽃을 보며 곱고 예쁘다고 했었지' 문득 떠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마 집에 갈 때마다 꽃을 사 갔다.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엄마 일기장에 적혀있던 시. 엄마가 좋아하는 꽃. 김소월의 시 제목 <산유화>는 한자로 山有花이다. 산에 있는 흔한 꽃이란 뜻이다.
평범한 인생을 사는 우리 인생 같아 정겹고도 소중하다. 꽃이 피고 지는 것, 사람이 나고 떠나는 것 모두 자연의 섭리이지만, 바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는 못내 아쉬운 인생이라는 생각에 서운하고 서러운 요즘이다.(2021년 4월 4일, 엄마와 함께 맞은 마지막 봄)
엄마와 함께한 소중한 순간을 틈틈이 글로 남겼다.
2021년 4월 4일 오후 1:43 : 토요일 손자 데리고 아들이 와서 어미 간병한다고 동분서주다. 5월 아들네로 들어간다. 한집에서 살잔다. 점점 숨도 가빠지고 힘도 빠지는 게 몇 달이나 버틸까 모르지만, 이사하고 합치기 까지만 하고 내 인생 끝나면 좋겠다. 산책 나가자고 하여 따라나가 보니 개나리에 벚꽃에 봄 꽃이 만발했네 그려. 세월이 참으로 잘도 흐르고 있다. 이 상태로 일 년 더 살면 무엇하며 무의미한 삶을 사느니 일찍 북망산에 가면 좋으련만… <떠난 엄마의 일기 中>
엄마는 가끔씩 개인 카톡에 자신의 심경을 남겼다. 늘 씩씩하던 엄마의 진짜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소중하면서도 아프다.
이날 엄마는 2021년 마지막 봄을 보았고, 여름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내다 북망산으로 떠났다. 유독 차가웠던 겨울이 지나고 다시 새 봄이 찾아왔다. 엄마는 아들과 함께한 마지막 봄을 보냈고, 나는 엄마가 없는 첫 봄을 맞았다.
2021년 엄마의 마지막 봄 이야기다. 엄마는 같은 해 8월 떠났다. 글의 힘이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가끔씩 들추는 슬픈 기억이지만, 희미해진 엄마와 함께한 추억이 한 올 한 올 되살아 난다. 세상의 모든 자식이 곁에 있는 엄마를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엄마와의 추억이 허무한 눈물이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