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한 대기업에 15년 넘게 다녔습니다. 취직하기 힘들고, 공무원을 제외한 직장인의 평균 근속기간이 5년이 채 안 되는 요즘, 십수 년을 한 직장에, 그것도 큰기업에 다녔으니 직장인으로는 나름 안정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순탄치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15년 넘게 몸담은 곳에서 저는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을 거쳐 정직원으로 어렵게 입사했습니다. 입사 과정을 비롯해 지나온 세월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어요. 알게 모르게 또는 대놓고 펼쳐지는 소외와 차별을 감수해야 했죠. 먹고살아야 하기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꿋꿋이, 열심히 버티며 오늘까지 왔네요.
돌이켜보니 모든 게 소중한 경험이고, 쑥쑥 커가는 과정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살면서 겪는 온갖 시련을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만 찾아오는 것으로 여기잖아요.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고요. 또 시간이 지나면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추억하기도 하죠. 한층 여유로워진 몸과 마음으로 그때 그 시절을 곱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처럼 말입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연 없는 무덤 없듯, 우여곡절 없는 직장인은 없습니다. 그런 과정을 겪었기에, 지금도 이겨내고 있기에 지금의 제가 있고, 좌충우돌, 다사다난했던 회사 생활 덕분에 후배들을 위한 여러 권의 책도 펴낼 수 있었죠.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남들과 조금 다른 직장생활을 겪으며 원래부터 잘난 동료들은 느끼지 못했을 깨달음을 많이 얻었어요. 덕분에 직장생활이라는 삶의 경험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또 남들보다 더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으려고 애썼습니다. 이제는 그런 노력조차 추억이 되었을 만큼 충분히 적응했고, 후배들을 위해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리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도 배우는 과정이고 깨닫는 중이지만 말이죠.
평범한 사람들보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던 제가 평범한 직장생활을 꿈꾸면서 지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던 노하우를 여러분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서민의 아픔을 알고, 삶의 깊이를 안다고 하잖아요.
서른 살의 시작, 3개월 단기 아르바이트
<드라마 '잔혹한 인터' 한 장면>
스물여덟 살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일 년 동안 야근만 하던 광고대행사를 박차고 나왔어요.
"네가 잘나가는 대학 나온 것도 아니고, 경력도 없고… 대학원 졸업한다고 더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냥 다니지? 어머니도 모셔야 할 텐데."
학업을 위해 그만두겠다는 저에게 팀장의 자존심 박박 긁는 위로는 퇴사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죠. 처음에는 미국에서 자리 잡은 누나한테 빌붙어 유학하려고 했어요. 어느 정도 준비했을 무렵, 몸이 불편한 외할머니를 모시는 어머니를두고 떠날 수 없어 국내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모 경제지와 어린이신문사에 도전해 최종 면접까지 올랐다 떨어진 경험이 있거든요. 왠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웬걸, 그 뒤로는 서류 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잠깐의 운빨이었나 봅니다.
경력을 쌓으려고 인터넷신문 필진과 넷포터 활동도 하고, 모 경제지에서 스폰서 섹션에 기사광고를 따 오는 영업 비슷한 일도 했습니다. 문화예술 분야를 다루는 한 언론사에서 수습기자로도 일했고요. 60만 원 정도의 열정 페이 덕(?)에 1년간 모아놓은 돈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심지어 지금은 사라진 듣보잡 매체에서 열정 페이로 연명하다 수습기자 3개월 만에 잘리기까지! (아니라고는 하지만, 국장과 함께 취재하러 갔다가 수백만 원짜리 회사 카메라 렌즈를 분실했기 때문이 분명합니다)
다시 대학원생 백수가 되었습니다. 취업 준비 중이었지만, 어머니 눈치가 보여 아침마다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던 동네 백수 친구와 약수터에 자주 올랐어요. 그러던 어느 봄날 대학교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르바이트할래?"
"내 나이가 몇인데 아르바이트를 해요."
대기업이라는 말에 솔깃! 면접을 보기로 했습니다. 대학원 등록금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죠. '그래, 다 경험이야. 아니, 얼마나 다행이야. 아직은 학생 신분이니까 아르바이트로 경력 쌓는 것도 괜찮아.' 제 나이 서른의 봄이었어요.
다행히 면접 본 팀장이 제 대학 전공과 광고대행사 경력, 대학원 전공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심지어는 얼마 받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뭐지? 떠보는 건가? 그렇게 급한가? 주는 대로 받으라고 해야 맞는 거 아닌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 다다른 생각은 '역시 대기업이라 다르구나!'였죠. (돈이 궁할 때라)
어느 언론사 최종 면접에서 수습 기간에 월 80만 원을 준다는 말을 들었고, 단기간에 잘린 수습기자 시절에는 월 60만 원 남짓 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제 몸값은 이미 최저가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가뜩이나 키도 작은데 더 작아진 듯한 제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머뭇거리니 팀장이 괜찮으니 편하게 얘기하라고 했습니다. 돈이 궁해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도전하기로 했어요.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백... 팔.. 십.. 만... 원...."
"그럼 이백 만원으로 합시다."
회사 돈이니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알바 월급을 200으로 정하는 팀장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향후 이 회사의 대표이사가 됨.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셨네요.) '알바 월급이 200만 원이라니! 도대체 이 회사 직원들은 얼마를 받는 거야?'(나중에 보니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진 않더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부를 걸 하는 아쉬움도 살짝 들었죠. 회사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일사천리로 계약이 성사되고 출산휴가를 받은 고마운 임산부를 대신해 3개월 단기 아르바이트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3개월이 지난 뒤 3개월을 더 연장했고 이후 계약직으로 입사했습니다. 1년 뒤에는 꿈에 그리던 정직원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대졸공채와 동등한 조건의 입사였죠.
가만히 앉아서 성취한 일은 아니었어요. 계약직 시절 틈틈이 논문을 써서 대학원도 무사히 졸업했습니다. (정규직 입사 조건 중 하나는 대학원 졸업장이었죠) 정신없이 바빴지만, 학업을 병행하며 최선을 다했어요. 회사에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죠.
물론 일도 열심히 했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가슴 쓰린 일도 많았고요. 한 번은 출입문에 카드 키를 찍을 때 옆에서 누군가 "삑! 알바입니다"라는 말을 웃으며 내뱉었어요. (이후 가장 친한 동료가 되었답니다) 카드 키에 적힌 사원 번호가 달랐고, 명절에 알바가 선물 세트를 받을 때 정규직 직원들은 현금 봉투를 받았습니다. 혼자 치약. 참치, 샴푸가 잔뜩 든 상자를 들고 퇴근하는데 손이 부끄러워 혼났습니다.
힘든 시기에 남보다 쉬운 방법으로 대기업에 입사한 것은 맞습니다. 감사할 일이지만, 감수해야 할 일도 많았어요. 공채나 경력직과 달리 제대로 된 입문 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아르바이트생 때부터 실무를 맡아 실전에서 뛰면서 모든 것을 배웠어요.
누군가는 저에게 뒷구멍으로 들어왔다는 저급한 표현을 사용했고, 누구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을 웃으며 면전에서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방패가 되어준 막강 파워 팀장과 천사 같은 몇몇 동료들 덕에 잘 적응해 나갔습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좋은 점이 더 많았습니다. 취업 준비할 때 걸렸던(술도 못 마시는데) 역류성 식도염, 미란성 위염, 위궤양, 십이지장염, 헬리코박터로 인한 질병 등이 취업 후 저절로 나았습니다. 놀라운 경험이었죠. '건강해진 몸과 마음을 바쳐 더욱 열심히 일해야지'라고 다짐하고 행복하고 신나게 일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입사 경로가 조금 달랐을 뿐 실력이 남들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밀리지 않으려고, 못나 보이지 않으려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늘 정신을 바짝 차린 덕이었죠. 궂은일도 야근도 기꺼이 나섰습니다. 주중에 이틀은 대학원에 가야 했기에 연애를 뒷전으로 미루고 주말에 출근하는 날도 많았어요. 참다못한 여자 친구(다행히 지금의 아내입니다)가 주말마다 출근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회사까지 찾아온 일도 있었죠.
이렇게 쓰고 보니 서럽고 더러운 순간이 가득해 눈물로 지새웠을 세월 같지만, 당시에는 열등감도 크지 않았고, 돌이켜보면 깊게 파인 상처도 없어요. 처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안정된 직장생활이 제게 간절한 소망이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 업무 영역이 넓어지면서 여러 팀 사람과 함께 일하고 회사 밖에서도 어울렸습니다. 공채 출신이 아니라 동기는 없었지만, 그들 못지않은 친한 동료들도 생겨났어요. 회사와 일, 직원들과 서서히 동화되었습니다.
나이가 드니 좀 뻔뻔해지더라고요. 대기업에 다닌다면 "공채 출신이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출신 성분을 묻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학원 다니다 인턴으로 6개월 일하고 입사했어요."
'인턴' 뜻이 '정식 구성원이 되기에 앞서 훈련을 밟는 사람'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죠. 아르바이트(본래의 직업이 아닌, 임시로 하는 일)나 인턴이나 정식으로 채용되지 않고 임시로 일하는 건 같으니까. 그런데 끝까지 이렇게 말하는 선배도 있었죠.
"쟤 알바 출신이야."
아무 타격도 없었습니다. 저보다 한참 먼저 입사한 선배는 저보다 낮은 직급으로 퇴사했거든요. 저에 대한 시기 질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얼마나 능력 있는 알바생이었으면 차기 대표이사가 정규직으로 채용을 했겠습니까.(허세) 이제는 좀 당당해도 되지 않을까요?
독특한 출신 성분 덕에 경험한 색다른 감정들이 저를 더욱 견고하고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대학 나와 순탄하게 남들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쉽게 입사했다면 만족감도 분명 덜했을 테니까요. 미천한? 출신성분 때문에 남들보다 좀 더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고, 매사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다 보니 눈치도 빨라졌어요. 무엇보다 잘난 사람들 틈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직장생활에 현명하게 적응하는 저만의 방법을 터득했다고나 할까요.
아르바이트 시절, 계약직 시절을 거쳐 대기업 정직원으로 안착하고 자리 잡는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직장생활 노하우를 흔적(글)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어설프게 시작한 직장생활이기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절박하게 터득한, 저만의 특별한 과거에서 배운 노하우를 공개하겠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도움 받는 사람이 분명 있지 않을까요?
직장인 여러분, 현재 처한 상황이 희망 없어 보이고 최악이라고 느껴지더라도 매사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조금 더 성장할 기회로 삼으면 좋겠어요. 어제의 내가 반드시 오늘의 나를 결정짓는 건 아니니까요.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준비하면서 미약하게라도 성장하고자 한다면 서서히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성장하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조금은 둔해질 줄 아는 지혜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버틸 수 있는 에너지가 빨리 방전되지 않으니까요.
아르바이트 시작, 천재일우千載一遇
'천 년에 한 번 만난다는 뜻으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뜻한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엄청난 기회이니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운명처럼 주어진 특별한 기회였으니 최선을 다할밖에. 설사 그것이 아르바이트 일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