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부모의 생각보다 사려가 깊습니다"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봅니다. 생일이 하나도 달갑지가 않네요. 작년에 정부에서 줄여준 나이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못내 아쉬울 다름입니다.
올해 생일은 월요일. 퇴근 후 씻고 나왔더니 학원에서 막 돌아온 아이들이 케이크에 불을 붙여놨더라고요. 택배(선물)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편지를 먼저 주었습니다.
나이 들어 에스트로겐만 들어가는 아빠는 아이들 편지를 읽으며 울컥했습니다. 편지 내용이 작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거든요.
"요즘 아빠랑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서 좋아요. 빨리 시험 끝나고 여행도 가고 싶어요. (중략)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친구들 만나느라 바쁜 와중에 아빠랑 놀아주고 쇼핑도 함께 가주는 게 오히려 고마운데, 시험 끝나고 여행까지 가자니 기분 좋았습니다. 오래도록 건강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온 딸아이와 식탁에 마주 앉아 간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자주 나눕니다. 아이들 나이가 늘면서 대화의 질과 밀도는 점점 높아집니다. 신기하고 특별한 경험입니다.
수험생 딸이 지쳐 보이면 안쓰럽고, 기운이 넘치면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요즘에는 기말고사 준비하느라 스카에서 새벽에 돌아와 얼굴 볼 시간이 줄어 아쉽습니다.
"말 하나하나 흘리는 거 없이 귀담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가 항상 저한테 잘해주시는 만큼 저도 잘해드리도록 노력할게요."
중2 아들이 이렇게 아빠 마음을 헤아려 주다니 감동했습니다. 늘 철딱서니 없는 아들이라고만 여겼는데, 언제 이렇게 훌쩍 컸을까요. 아빠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아빠 마음을 관통해 버렸네요. 특히 누나도 잘 못하는 '사랑해요'라는 말도 어찌 그리 잘하는지 여전히 귀여운 막내입니다.
아이들의 뇌가 미친 듯이 파닥거리는 청소년기인 만큼 생각과 행동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한 청소년 전문가가 방송에 나와 사춘기 아이를 키울 때 부모는 수시로 눈과 귀를 닫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말입니다.
아이들과 집에서 한참을 머물면 보기 싫은 행동과 듣기 싫은 말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조금은 참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얘기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이 넘치는 사람이 부모 아닐까요. 여기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라는 말까지 수시로 추가하면 아이들이 부모의 모든 말을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생일에 아이들에게 편지 한 장 받고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딸내미가 친구들하고 쏘다니느라 공부는 뒷전이던 시기도 잠깐이었습니다. 아들이 매일 밤 통화하고 시끄럽게 게임하느라 잠을 못 이루던 때도 잠깐이겠죠.
제가 아이들에게 성급하게 화를 내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화 안 내고 말하는 게 더 무서워요."
가끔 꼭 필요한 이야기만 전하면 아이들은 잘 알아듣습니다. 굳이 자잘한 이야기까지 추궁하며 서로의 감정을 소모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일 밤 잠을 자야 하는데 헤드셋을 끼고 게임하는 아들 목소리가 너무 커 화가 났습니다. "조용히 좀 해!" 짜증 내며 문을 쾅 닫은 적 있어요.
"아빠 어제 너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다음 날 아들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후회스럽고 미안했어요. 이날 이후에도 같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화를 낸 적은 없습니다. 좋게 말해도 다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아들 문제가 아닌 화부터 낸 제 잘못이 더 컸으니까요.
아이들은 부모의 생각보다 사려가 깊습니다. 사춘기라는 반항의 터널을 지나기 때문에 엉뚱한 곳에 핀트를 맞출 때가 있을 뿐이겠죠. 제가 어렸을 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복잡하고도 미묘한 성장 과정을 거칩니다. 멀쩡한 어른이 되기 위한 여정입니다. 아이들 편지 한 장에 아빠 마음이 두 배는 더 관대해졌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생일 선물도 기분 좋지만, 올해 받은 편지는 더더욱 오래오래 기억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