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가 죽었다>, 드라마 <대행사>, <굿파트너>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임원이나 연차 높은 상사들뿐만 아니라 20, 30대의 선후배, 동료들이 직장을 떠나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퇴사하는 경우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등 떠밀려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하죠.
퇴사하기 전 사무실을 한 바퀴 돌면서 선후배나 동료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거나, 감사 메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반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 보이는 사람, 평소 싫어하던 상사에게 불평불만을 표출하고 임원이나 대표이사에게까지 타인에 대한 악의적 정보를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로 회사를 떠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분노를 자제하고, 그동안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백 번 잘하던 사람도 떠나는 순간에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면 마지막 모습만 구설에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돈만큼 중요한 게 뭔지 알아요? 평판이에요. 한국에서는 평판이 전부입니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대사입니다. 이 짤막한 대사를 길게 풀어가며 영화는 흘러갑니다. 자신의 평판에 목을 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는 세상에 전하는 씁쓸한 일침이었습니다. 꾸며진 평판은 언젠가는 드러나고 만다는 경고였죠.
한국인에게 중요한 평판은 퇴사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 좌우되기도 합니다. 동료들에게 인상 깊게 각인된 특별한 퇴사 사건은 두고두고 회사 사람들에게 회자됩니다. 하지만 평범함에서 벗어난 남다른 사건은 안 좋은 평판으로 금세 소문이 납니다. 친구가 대리시절 술자리에서 상사와 다투고 퇴사한 얘기는 친구가 부장급이 된 지금도 사람들 입방아에 오릅니다. 능력이 아닌 평판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원하지 않는 해고나 권고사직, 명예퇴직, 계약 만료 등의 사유로 회사를 떠나는 경우에도 부정적인 인상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희생과 고생을 몰라준다는 서운한 생각에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직장생활을 오래하면서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잘린 임원을 수도 없이 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회사를 한바퀴 돌면서 온화한 미소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진정한 유종의 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평불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거나 속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면 그동안 직장에서 쌓아온 덕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여전히 회사에 남은 이들은 볼품없는 당신의 마지막 모습만 기억할지도 모르니까요.
"고아인, 넌 마지막까지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줬어. 네가 남긴 기획안, 아이디어, 사례조사까지. 네가 회사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잘 활용해 볼 게."
"마지막까지 좋은 선배로 기억되고 싶었는데, 이렇게 끝이 나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고아인, 넌 좋은 후배였어. 앞으로 네가 어디서 뭘 하든, 네가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길 바랄게."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드라마 <대행사> 속 퇴사 장면입니다. 고아인 팀장(이보영)은 자신의 팀이 6개월 내 매출 50% 상승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퇴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VC그룹 부사장 강한수(조복래)의 훼방으로 실패했죠. 억울한 상황으로 회사를 나와야 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더욱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퇴사 시 인수인계는 인사관리와 평판관리의 마지막 정점입니다. 회사와 상사에 대한 서운함이 크더라도 최선을 다해 작성해야 합니다. 정리를 하면서 자신의 업무 처리 과정을 되짚어 볼 수 있고, 과거 업무에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향후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면 좋습니다.
컴퓨터 속 자료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서버 등에 올려 두거나 새로운 담당자에게 전달해 근거를 남기는 것이 좋습니다. 업무를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인수인계서를 제대로 넘기고 퇴사해야 수시로 걸려오는 달갑지 않은 전화를 정당하게 거절할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전 직장 동료들의 책임 떠넘김도 피할 수 있죠.
'어디 한번 당해봐라'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갑자기 퇴사하게 된 여직원이 업무 인수인계도 없이 자신의 컴퓨터를 포맷해버리고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팀원 모두 곤란해하다 결국 그녀에 대한 원망만 점점 커졌습니다. 그간 회사에서 쌓아온 실적과 인연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죠.
이직 시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해도 평판조회 한 방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이직을 위해서는 경력만큼 평판도 꾸준히 관리해야 합니다.
최근 온라인 취업포털 사이트 잡코리아가 기업 채용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직원 채용 시 평판조회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기업 60%가 평판조회를 실시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평판조회를 진행하는 기업 중에는 '경력직만 한다'는 기업이 응답률 60.6%로 가장 높습니다. 평판조회 방법은 이전 직장 동료나 상사와의 전화통화가 가장 많았습니다. 평판조회를 통해 확인하려는 부분은 업무능력 및 전문성, 이력서에 기재한 성과 및 경력사항 사실, 상사, 동료와의 대인관계, 지원자의 인성 확인 등이었습니다.
설문에 참여한 기업 중 54.5%는 채용이 거의 확정된 상태에서 평판조회 결과 때문에 채용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반대로 기업 53.5%가 채용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판조회 결과 때문에 합격시킨 지원자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언론사에 근무하는 친구는 퇴사한 직원에 대해 묻는 전화를 자주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제대로 마무리하고 나가지 않았으면 옮기는 회사를 위해서라도 좋은 말을 해줄 수가 없어”라고 하더군요. 저도 같은 팀 후배에 대한 평판조회 전화를 받은 적 있습니다. 솔직히 내보내고 싶은 동료였지만,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인사팀뿐만 아니라 개인적 친분을 이용한 평판 조회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평판조회 시 동료들은 대부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아는 범위 안에서 솔직하게 말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평소 생활을 잘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친한 관계였더라도 무조건 두둔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관계의 끝은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다. 그러나 내 손으로 해내는 끝은 누가 뭐라든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끝이란 곧 새로운 시작과 같은 뜻이란 걸 이제 알기에 이별이 아프지만은 않다.'
드라마 <굿파트너>에서 잘나가던 차은경 변호사(장나라)가 회사를 떠나며 남긴 말입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하면서 젊음을 바쳤지만, 그녀는 대표에게 퇴사 압박을 받습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른 뒤 자발적인 퇴사를 선택합니다. 끝이란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겼습니다.
누구나 입사할 때는 목적이 하나이기 때문에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퇴사할 때는 다릅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끌려 다니지 않게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기분 나쁘고, 어이없고, 분해도 떠나는 모습에는 여운과 향기를 남기는 게 향후의 직장생활을 위한 현명한 선택입니다.
인간관계도 평판관리도 직장에 다니는 동안에는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이라도 퇴사라는 ‘끝’은 또 다른 ‘시작’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떠난 누군가의 마지막을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니까요.
2024.10.11(금) <OTT와 직장, 나를 지키는 방법> 연재 끝.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