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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Feb 09. 2017

고전으로 세상을 읽다

신영복의 <강의>를 읽다

 신영복씨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신영복씨가 돌아가시면서 그분의 일생을 짚는 기사들을 보고, 20년간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아둔 책을 읽어보게 되면서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깊이 있는 학문이 일상에 녹아들어 가 있으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강의>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들을 고전들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완독 했다고 말할 수 있는 동양 고전은 <논어>, <맹자>이고 나머지의 <주역>, <서경> 등등은 처음 접해보았다. 당연히 많은 고전들을 책 한 권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각자 책을 읽는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난 <강의>를 통해서 각 고전들을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읽는 법을 배웠다. 또한 우리가 당면한 과제들에 대해서 책을 통해 어떻게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갈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신영복씨의 따뜻한 심성과 현명한 답들에 토닥토닥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시경>, <서경>을 제외한 책들을 <논어>, <맹자>, <장자>, <순자>, <한비자>처럼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치란 어떠한 것인지 등에 대한 철학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보지 못한다고 한 것처럼, 나는 동양 고전이 이렇게 깊이 있는 학문인 것을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논어>와 같은 책을 별개로 읽는 것과는 다르게, 각 주장들이 서로 경쟁하고 수정하는 투쟁의 역사를 보면서 또 각 투쟁에 담긴 논리를 보면서 어떠한 것도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철학들 역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발달과정과 당면한 사회의 세태 또 주위의 사람들과 같은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논어를 읽을 때는 오오 그러네 하다가 묵자가 반박하는 논리를 보면서 동조하게 되는 나를 보면서 주체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다 읽고 깨달았다(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은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이다). 국소적인 의미나, 누구의 주장인가에 갇혀 ‘~파’를 형성하고 구절을 앵무새처럼 암송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전을 읽고 나에게 스스로 질문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해보고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관점을, 새로운 답을 해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군자불기”이며 앞으로 해나갈 동양고전의 독법이다.     




 이 강의의 목적이 관계론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삶이 지향하는 자치는 인성의 고양으로서 사람이 인(仁), 덕(德), 치국, 평천하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봤을 때 우리는 인(仁)으로 나아가는 것도 얼마나 어려워하고 있는가? ‘인간관계’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어렵고,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직장이나 학교를 가더라도 업무나 공부보다도 상사나 친구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만 보아도 그렇다.     


 묵자는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라고 말한다. 최근에 층간 소음으로 고통받으면서 정말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 문제를 좀 더 지혜롭게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짜증도 많이 내면서 끙끙 앓기도 했지만,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일인가에 대해서 스스로도 질문해보았고, 저 사람은 어떠한 마음과 과정으로 저 정도의 배려심을 가진 것일까?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정말로 이 문제에 대해서 지혜로운 답을 얻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인터넷에 종종 층간 소음을 검색해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나타나는 사회의 자화상은 참으로 씁쓸했다. 비록 나는 부족해서 이렇게 쉽게 화가 나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지만 힌트라도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검색해서 나오는 것은 층간 소음을 복수하거나 고소하는 방법 등이었다. 사람들은 천장에 ‘우퍼 스피커’를 달기도 하고 법적인 소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소음으로 새벽 4시까지도 잠을 설치면서 짜증이 났던 경험으로 이해가 가면서도, 씁쓸했다.


 나아가서 이것으로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의 황폐화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은 자신들의 소굴에서 나와 이웃들과 관계를 맺는데 인색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 집 마련’이 하늘의 별따기가 된 요즘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1년 남짓 월세 계약으로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이웃과의 관계의 중요성은 더욱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따끈따끈한 시루떡 하나씩 돌리면서 인사를 하며 ‘관계’를 맺지만, 이제 그러한 관계를 귀찮아하고 피곤해지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그러함에 더욱 반성했다. 내 윗집, 옆집 거주자들이 나의 ‘이웃’이 되었을 때도 그렇게 짜증이 났을 까? 그러면서 동시에 상상해보았다. 20년 전만 되었더라도 어땠을까? 윗집에서 쿵쿵쿵 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어유~~ 윗집 은영이 고것이 또 뛰어대나 보네. 내일 가서 혼구녕을 내줘야겠어.”라고 하며 다음날 찾아가서 호호호호 떠들며 귤 하나씩 까먹다가 볼기짝을 찰싹하고 “밤에 일찍 자야 키 큰다!”하지 않았을까.


 맹자가 여민동락에서 말한 것 역시, 최상의 즐거움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각 고전들을 스스로 읽어보지 않을 채로 요약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스스로 돌아본 점들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이 기록들을 남긴 후, 책을 스스로 읽어보고 또 수정하고 그러다 보면 <민자>가 나오지 않을까.(^^)

 

 앞서 등 붙이고 잠잘 집 한 채 구하는 것도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을 이용해서 서로 경쟁하게 만든다. 생산과 소비의 수준은 더 이상 사람들의 삶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필요가 아니라,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 생산과 소비가 결정된다. 그중의 예시가 바로 현재의 부동산 투기이다.

 

 초등학생들의 꿈에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들이 세태에 물들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즐거운 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생들의 꿈까지 임대업자들이 차오른다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럽다. 투기자들은 더 이상 집에서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땅값을 오르는 것을 기다려 이윤을 보기 위해, 높은 월세를 받기 위해서 집을 산다. 그들은 자본을 굴려 또 자본을 만들어내고 끝이 어딘지도,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끝없는 투기와 축적을 이어간다. 


 한비자는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했다. 우리의 세태가 그렇다 나라는 코딱지만 한데 부유한 자들은 땅과 집들을 차지하고 가난한 자들은 마치 예전의 ‘소작농’들이 그랬던 것처럼 집들을 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참 끔찍한 일이다. 언제 일본처럼 거품 경제가 폭발할지, 그럼에도 끝없이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제도가 갖추어져야 할 다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지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 한비자의 법치주의처럼, 강력한 법을 제정하여 순환시켜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의 지배자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까지 이러한 자본의 논리는 너무나 깊숙이 박혀있다. 강압적인 제도는 개선이 아닌 소포제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붕괴의 재촉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나는 순자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자는 예, 즉 법이 근본에 있어서 즐겁고 유연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이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질서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감과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

 차근차근하게 해결해야 한다. 민중들이 작금의 논리에 사로잡힌 이유는 한편으로는 정직하고 열심히 돈을 벌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배고픈 개미들이 꿀을 따라간다고 하여 나무랄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바른 교육으로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자본주의가 최상의 논리가 아님을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묵비사염, 나라도 물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국가가 물들여져 있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면 사회적 제도로서 그것을 제제해야 한다. 얼마 전 TV에서 헨리가 한국의 성형에 대하여 한 발언을 보았다. 성형을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으로서 기호로 존중해줘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에서는 그런 것들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상품 미학처럼 무의식적으로 강요받고, 지하철, 버스, 티비, 뉴스 기사 곳곳에서 “당신의 얼굴은 추하다. 지금 보는 ‘이’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당신도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강요받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세태에 물들게 하고 광고들이 부추기는 것은 제제함이 마땅하다. 예전에 한 실험을 보았다. 병원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면 이유도 모르고 분명히 이상한 행동임에도 따라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물며 하루에도 수천번씩 노출되는 성형광고는 성형공화국에 일조하고 있다.

 개개인 역시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두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깨우쳐야 한다. 자본의 논리에 먹히지 않기 위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차근차근히 거품들을 탄탄한 벽돌들로 쌓아야 하는 것이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책에 빼곡하게 메모가 될 만큼,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책이었던 것 같다.

동시에, 혼자 이 고전을 읽었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을 내용들을 신영복 씨의 고전 독법을 빌려 그것에 동조되어 읽기도 하고 나만의 시각으로 해석해 볼 수 있었다. 똑같은 재료라도 기술에 따라 결과물이 다르듯이, 그동안 동양 고전을 멀리했던 나는 서투른 목수가 연장 탓한 것이 아니었던가. 주위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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