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매거진에서는 tvN드라마 ‘도깨비’가 다룬 인류사의 근본적 테마들(사랑, 우정, 운명, 인연, 시간, 기억, 망각, 용서, 죽음, 전생, 내세, 신 등)을 고고인류학적 자료와 관점을 통해 이야기 해봅니다.
(*이 글은 드라마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사랑’, ‘죽음’,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얼마전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이하고, 매일 뉴스에서 안타까운 사망소식이 끊이지 않고, 때로는 나와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닥뜨리면서.. 나는 이 질문을 한번씩 던져본다.
수백만년 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질문..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 인류 수백만년 역사의 무수한 집단 및 구성원들은 다양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져왔었다. 전생, 부활, 다음 생애를 믿고 운명적인 인연의 사랑을 믿기도 해왔다. 귀신이든 천사이든 수호자이든 저승에 있다 한번씩 이승에 다녀가는 존재이든..죽음 후에 우리들 곁에 있거나 보호해 주거나 해를 끼치거나..어떠한 다른 생명체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믿기도 하여왔다.
이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의 엄청난 고통과 그리움을 승화시켜주는 고귀한 믿음이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도..그 슬픔을 잊기위해 그 믿음을 이어가기도 했다.
드라마 ‘도깨비’는 ‘사랑’과 ‘죽음’에 대해 잔잔한 깊이로 흥미롭게 다룬다. 주인공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인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의 전생, 운명, 죽는 시기, 내세, 몇번째 삶인지 등에 대해 여렴풋이 혹은 확실하게 알아간다.
도깨비 김신은 (검이 뽑히지 않는한) 본인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고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 세상사 흐름과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과 운명을 어느정도 알고있다. 도깨비신부 지은탁은 자신의 독특하고 슬픈 삶의 이유와 본인과 주변사람들의 미래를 어느정도 알고 있으며 본인이 명에 따라 일찍 죽어도 다음생애에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김선은 뒤늦게나마 자신의 전생을 알게되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억을 잊은 척 살아가고, 저승사자는 전생에 자신으로 인해 죽은 김신과 김선에 대한 우정, 사랑, 미안한 감정이 얽혀 괴로워한다.
본인과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보
‘도깨비’의 주인공들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간절히 알고싶어 해왔던 것들을 알고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첫번째는 ‘본인과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보’이다. 주인공들은 본인과 사랑하는 이들이 불멸의 존재인지 언제 죽는지 왜 그런 생사의 운명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혹은 확실하게 알고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감에 따라 사랑하는 이들이 죽고 과거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배우고 하는 과정을 통해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에 맞서기 위해 인류는 불멸을 추구하고 영혼의 존재를 믿기 시작했으며, 전생과 부활에 대해 생각하고 신앙과 종교를 가지는 등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갈구해 왔다.
이러한 발버둥(?)은 초기 인류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왔다. 석기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장송의례는 자신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죽음∙영혼∙내세와 관련한 신앙과 종교적 믿음은 사람들에게 긍정적 작용도 했지만, 인류역사에서 수많은 전쟁∙학살∙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본인과 가족들의 부활과 불멸을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이 불가피한 거대 피라미드 건설에 매진했고, 이외 수많은 집단사회에서 나타나는 무덤축조∙제사∙부장품 및 순장 등은 죽음의 공포에서 비롯된 문화적 행위라 말할 수 있다.
죽은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두번째는 ‘죽은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이다. ‘도깨비’ 주인공들은 본인과 사랑하는 이들이 죽은 후에 다음생애가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는지 다음생애에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혹은 확실하게 알고있다. 첫번째 능력과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이러한 정보를 어느정도 알고 있다면 어떠할까? 행복할까? 오히려 더 불행할까? 위에서 말한 장송의례를 비롯한 개인적∙문화적 행위들은 죽은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은 갈망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슬픈 불멸주의자」의 저자들은 ‘영혼’이라는 것이 인류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발명품이라 말한다(솔로몬 외 2016). 인간은 의식적으로 때론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죽음을 상기한다. 우리는 육체를 뛰어넘는 영혼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내고, 이와 연결되는 신화∙사후세계∙신∙수호천사∙초자연적 우주 등을 마음속에 그리고 물질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 싸워왔다.
과거-현재-미래를 연결지어주는 기억 혹은 물건
세번째는 ‘과거-현재-미래를 연결지어주는 기억 혹은 물건’이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선의 그림족자와 반지는 과거의 정보를 거의 확실하게 기억하게 해주는 물건이다. 우리 인류는 누구나 이러한 물질적 증거를 통해 자기 자신,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중요한 정보∙사건∙추억을 남기고 싶어한다. 이는 인류 뿐만 아니라 많은 생명체들이 행하는 일종의 ‘과거-현재-미래 연결 시도’이다(글쓴이의 브런치글 ‘과거 연구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참조). 동굴벽화부터 조형물, 설화, 책, 신문, 사진, 페이스북 그리고 다음 브런치에 이르는 것들은 이러한 인류의 기록남기기 행위에 해당된다.
이렇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하는 욕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연관되는 듯하다. 자신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무언가를 남기려 하는 것이다. 인류를 비롯한 생명체들의 자손을 남기려는 본능적 욕구 및 행위들도 이와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수많은 주술행위, 문화예술, 일상적 행동들은 이러한 공포와 욕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져 가는 것 같다. 묘비의 글귀, 무덤벽화, 시, 책, 그림, 노래 등을 통해 자기 자신 혹은 중요시 여기는 무언가에 대해 기록으로 남기면서 우리 인간은 만족을 느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불멸 추구라고도 할 수 있을까? 잘 남겨진 이러한 물질적∙비물질적 기록은 불멸의 것이 될 수 있다. 최근 폭풍적으로 유행하고 많은 사람들이 중독되어 있는 페이스북, 트위터, 브런치와 같은 개인 블로그 플랫폼들은 이러한 욕구와 상통하는 듯하다.
노력하면..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있는가?
'도깨비'처럼 인생의 진중한 테마들을 다룬 드라마 중 하나로 BBC 셜록 시리즈가 있다. 제한적인 단서들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미래도 예측해보는 과학수사는 글쓴이가 공부하는 고고인류학과 닮아있기도 하다. 셜록 홈스는 천재적 자질로 수많은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사람들의 죽음을 막아내며 본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본인을 살리기 위해 절친 존 왓슨의 부인 메리 왓슨이 죽자 견딜 수 없는 자괴감과 미안함에 폐인이 된다. 셜록은 메리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질문을 던진다. 그는 오하라의 소설 「사마라에서의 약속」을 인용한다.
바그다드 상인의 한 하인이 시장에서 여인의 모습을 한 ‘죽음’을 만난다. 하인은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와 주인에게 말을 빌려 사마라 도시로 도망간다. 그곳에서는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날 상인과 우연히 만난 ‘죽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 하인을 만나 저도 놀랐습니다. 오늘 밤 사마라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거든요..”(O'Hara 1934). 셜록은 이 소설의 결말을 싫어하여 본인 버전으로 결말을 내곤 했다. 하인이 사마라로 도망쳐서 살게 된다는.. 그러면서 셜록은 “노력하면..사마라에서 우리를 기다리는..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되물으며 괴로워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괴로움에서 오는 되물음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본인의 죽음을
어떻게 대비하고, 바라보고, 버텨내고, 다시 힘을 낼 것인가..
‘도깨비’에서 김신이 부활하고 지은탁의 기억이 돌아오며 둘은 드디어 결혼을 하고 정말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정말 어렵게 찾아온, 완벽하게만 보여온 행복의 나날들은 안타깝게도 얼마 가지 못한다. 지은탁이 젊은 나이에, 유치원 아이들과 교사들을 살리면서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때 저승사자의 말이 참 인상깊었다. “인간의 희생은 신조차도 계산하지 못하는 것이며, 너무나도 숭고하여서.. 잘못되는 경우가 없는 우리 사망자 명부에 오류가 생긴 것 같다..”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의 숭고함이 느껴졌다. 이러한 희생에는 결국 다른 이들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드라마에서 지은탁이 죽기 며칠전 한 말도 인상깊었다. 사망명부가 도달한다 하여도 개의치 않을 거라고.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고 그 순간이 다가오면 담담히 받아들이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순간순간 오늘 하루하루를 온힘을 다해 만끽하며 살아갈거라고. 이렇게 매 순간순간에 충실하는 것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할때 더 빛나지 않을까?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대상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언제나 큰 고통이다. 그것이 갑작스럽든 어느정도 예견된 것이든.. 그 슬픔과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죽음, 본인의 죽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어떻게 대비하고, 바라보고, 버텨내고, 다시 힘을 낼 것인가.. 이는 우리가 삶에서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한가지 글쓴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만 하기 보다는 마음가짐, 믿음, 행동,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어떻게든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인들도 그리했듯이.. 베르베르의 소설 「신」에서 주인공들이 죽음의 공포와 맞서며 “사랑을 검으로, 유머를 방패로”를 되뇌이듯이.. 무언가 해야만 한다.
(제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브런치 작가 '소셜필름큐레이터 시크푸치' 님의 도깨비, 죽음의 성찰 통한 생에 대한 열망..이 글도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seonkicheong/281 )
참고문헌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이은경 역), 2016, 『슬픈 불멸주의자』, 흐름출판.
O'Hara, J., 1934. Appointment in Samarra(사마라에서의 약속). San Diego, C.A.: Harcourt Brace
&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