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그랬다.
어릴 적 나는 그랬다.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아도 괜찮을 줄 알았고,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꿨다.
청소년시절 나는 입시와 경쟁 대신, 우정과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길 바랐던 부모님의 선택으로 대안학교에 진학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농촌의 작은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낯설고 불편했지만,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삶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어졌고, 스스로 탐구하고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곳에서도 '입시'는 현실이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왜 우리는 수능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나눈 적 있다. 그때 한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공부는 어디서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대학이라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해야 하는 거다.”
그 말은,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막연히 미대를 준비하던 나는, 대학에 바로 진학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여러 일을 경험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출판사에서 그림을 그려보고,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빵 냄새와 빵을 선물했을 때 받는 사람들의 미소가 좋아서 재밌게 수업을 들었고, 과자점에서 기술을 배우며 ‘푸드스타일링’이라는 분야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거다!” 싶었다. 좋아하는 그림과 요리, 사람을 연결할 수 있는 일. 그 길로 나는 스타일리스트가 되기 위해 다시 대학을 준비했고, 다행히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 이후 10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잘 살아왔다.
요리하고, 스타일링하고, 연출하는 일은 늘 재미있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 보람도 컸다.
광고와 매거진, 출판사들과 협업하여 일하고, 봉사로 개발도상국의 나라에서 직업훈련의 요리교육도 다녔다.
그때까진 진심으로 믿었다.
“나는 평생,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계절은 자주 바뀌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시간, 수입, 아이, 가족, 체력, 감정...
모든 게 변수였다.
좋아하는 일을 지키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도 해야 했다. 때로는 안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럴 땐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패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 이 현실도, 하고 싶은 일을 더 오래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구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느 날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잠시 멈춘 프리랜서 친구들, 직원들의 생계를 고민하는 자영업 선배들, 부모님의 병간호로 더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동료들...
그들은 모두 이렇게 말해줬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지.”
그 말이 참 위로가 됐다.
마흔이 된 나는, 다시 신입이 되었다. 익숙했던 프리랜서의 삶을 잠시 멈추고 새로운 조직에서, 새로운 역할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직무만큼은 푸드스타일링 그대로이다.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이제는 그 일을 더 오래, 더 건강하게 하기 위해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 역시 내가 나를 지키는 일이라 믿는다.
‘일’은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내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다만 더 깊이, 일이란 내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이 연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며 살아가기 위한 길을 회사에서 한 걸음씩 또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