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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리 Dec 23. 2021

취하지 말라

일상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

그는 집요하리 만큼 나에게만 술잔을 건넸다. 

"에이~ 왜 이래~ 술을 못 마시나?! 팀장이 권하는데 거절하는 거는 예의가 아니지?~ 자 한잔해~ 어허~ 한잔하라고~"

계속된 사양 해도 불구하고 그는 무안할 만큼 지속적으로 술잔을 들이댔다. 그의 작정한듯한 깐죽거림과 건들거림에 나름 착하게 잘 잠그고 있던 안전장치가 순간 모두 비상 해제되며 '그래? 좋아 내가 마셔주지!' 하는 일사의 각오로 야수 같은 내 안에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나의 전 직장 팀장이다. 세상 잘난 척은 다 하는데, 알고 보면 소리 요란한 빈 깡통 같은 사람이었다. 군대 같은 상하 복종 문화를 즐겼고, 자신의 명령에 순순히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상대를 참을 수 없어했다. 그날 회식 분위기로 봤을 때 평소 자신의 말에 다른 이들처럼 '네네~' 거리며 충성하지 않았던 것에 이미 찍혀 있던 차 술자리를 빌어 제대로 기를 꺾어줄 모양이었다.  

그렇게 전쟁터 접전지 전투부대와 같은 결의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나는 죽기 살기로 부어라 마셔라 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공간 이동하여 내방 침대였다. 도무지 전후좌우 뒤범벅이 된 간밤의 시간과 듬성듬성 끊어진 기억의 필름들만 스파크처럼 선득거릴 뿐이다.  

술독으로 만신창이 된 몸과 정신을 겨우 추스르고 출근한 복도에서 간밤에 술전을 벌였던 팀장과 딱 마주쳤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갑자기 고개를 숙이나 싶더니, 종종걸음으로 재빠르게 모른 척 지나갔다. 늘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건들건들 거리며 걷던 그가 아니던가? 도무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인간의 행동 패턴이 저토록 달라진 걸까? 

그가 달라진 이유는 어젯밤 회식을 함께 했던 권 과장이 소상하게 그 전말을 말해주어 오래 궁금해하지 않고 바로 알게 되었다. 갑자기 술을 글라스로 들이켰던 나는 팀장과 열댓 번의 대작을 이어갔고, 취기가 오른 상태로 평소 깡마른 그의 몸을 유심히, 찬찬히 훑어보더니 대뜸 "팀장님. 갈비뼈 한번 보여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단다. 회식을 함께 하던 팀원들 사이에 순간 정적이 흘렀고, 팀장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남의 갈비뼈는 왜 보자 하냐며 "과장님 술이 너무 많이 취했나 보네~이제 그만...." 하며 상황을 마무리하려던 찰나 집요하게 소리소리를 지르며 갈비뼈를 보여달라고 제발 보여달라고 하는 통에 빨리 상황을 정리하려고 결국 셔츠에 단추를 풀던 그 순간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그의 옆으로 후드득 달려가서 기어이 그의 갈비뼈로 기타를 쳤단다. 갈비뼈를 아래위로 훌트며 노래까지 불러댔단다. 순간 일행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팀장은 잠시 기타가 되었다가 허둥지둥 단추를 잠그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그날 이후로 나에게 다시는 술을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로 딱 1번 을 제외하고 여태껏 술에 취한 적이 없다. 

진심으로 나는 평소 누군가의 갈비뼈로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에서 조차 염두해본 적이 없다. 하물며 이 정도의 사건은 성추행이 아니던가 경찰서로 붙잡혀 가서 엄벌에 처해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다 싶지만 그때의 난감한 기억은 여전히 자다가도 이불 킥할 일이다. 


무언가에 취한다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기운으로 정신이 흐려지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되다'이다. 

평소 정상적인 사고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기도 하고, 몸도 마음도 가눌 수 없이 비틀거리는 상태.


나는 우울증으로 힘든 시기 무엇으로든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술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감정의 평균값을 상식 이상으로 넘어설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조심했다.

내가 경험한 우울증의 상태는 마음의 컨디션이 정상괘도를 벗어나 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취함'이 더해지면 상태의 증폭은 한결 커진다. 따라서 '취함'을 벗어났을 때 오는 '현타'의 상흔 역시 더 쓰라리다. 그것이 즐거움에서의 복구이건, 슬픔에서 비롯된 복구이건 비현실적 상황에 희로애락은 결국 우울이라는 현실적 자각과 함께 그 선명도를 더욱 진하게 만든다. 


포복절도할 만큼 웃기는 영화를 보고 정신줄 놓고 웃다가 다시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의 온도차는 한결 더 서늘하다. 가슴이 출렁거리는 음악을 듣거나 감정이입이 제대로 되는 소설에 빠져있다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는 철근을 메단 걸음만큼이나 느리고 버겁다. 사소한 자극에도 나가떨어지기 충분했던 연약한 시기에 이러한 것들이 하루를 망치기도 하고 긴 밤 잠을 뒤척이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상태와 무관하게 일상에 해야 할 것들은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돌아가야 했다. 일을 해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했다. 


발바닥을 딛고 있는 현실의 기울기와 온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소소한 유희를 과격하지 않게 즐기는 것. 우울증 시기에 심리적 평온을 유지하는 나만의 생존 노하우였다.  




우울증을 벗어난 현재 나는 다양한 '취함'을 즐긴다. 

그러나 술에 취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술에 취해 남의 갈비뼈로 기타를 연주했던 그녀가 다시 소환될 일은 없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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