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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의 매직

남기는 것도 버리는 것도

by 영동 나나 Mar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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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93세의 신발을 사러 갔다. 예전처럼 쉽게 걸을 수 없고, 발 모양도 변했다. 신발을 고르는 일이 예전보다 까다로워졌다. 다행히 편하고 맘에 드는 운동화를 골랐다. 계산을 마치자 가게 주인이 신발을 박스에 담아 쇼핑백에 넣어 건넨다. 93세는 쇼핑백을 받아 들더니 신발만 남기고 박스와 속지를 주인에게 돌려준다. 집에 들어오는 쓰레기를 줄이려는 것이다. 가게 주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말한다.

"이렇게 하시면 교환은 안 돼요."


식사를 조금씩 하는 93세는 병원에 입원하면 밥을 두세 숟가락 덜어내고 남은 밥은 비닐봉지에 담아 병원 냉장고에 넣는다. 퇴원할 때 비닐 안에 밥을 집으로 가져와 누룽지를 만든다. 69세는 구차스럽다고 눈살을 찌푸리지만, 93세가 만든 누룽지를 끓여서 맛있게 먹는다.


93세는 육수를 끓일 때 양파 껍질, 고추씨, 파뿌리를 모아 활용한다. 덕분에 냉동실은 자질구레한 것들로 가득하다. 바쁜 척하는 69세는 흙 묻은 파뿌리, 양파 껍질을 93세가 보기 전에 빨리 버린다. 그 대신 비싼 조미료 연두를 넣는다.


작은 창고에는 배달 음식 용기와 샌드위치 박스, 빈 병 같은 일회용 그릇이 한가득이다. 93세는  깨끗이 씻어 햇빛에 말려 보관한다. 가끔 모아놓은 것만으로 저녁 식탁을 차린다. 그날은 설거지가 없는 날이다. 사용한 그릇은 가위로 잘라 봉지에 빽빽이 담아 버린다.


집으로 들여오는 것도 줄여야 하지만, 나가는 양도 줄여야 한다. 어떤 날 우리 집 쓰레기통은 저녁이 되어도 비어 있다. 신기한 일이다. 93세의 매직이다.






69세는 길가에 터진 쓰레기 봉지를 보면 지난 일이 생각나서 우울해진다. 몇 년 전 두바이를 떠날 때가 생각난다. 팔 것은 팔고, 주변 사람들에게 줄 건 주었지만 버려야 할 것도 많았다. 두바이는 분리수거가 까다롭지 않아 박스에 옷, 주방 살림, 신발 등을 담아 버렸다. 다음 날 외출하려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문을 나서 보니 길가에 온통 우리 살림이 널려 있었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골라 가져가고, 남은 것들이 길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지난 삶이 길에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소중했던 것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모습은 기억과 시간까지 버려진 것 같았다. 한때 필요해서 샀던 물건, 누군가 나에게 준 선물, 좋아하며 쓰던 물건들이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69세는 박스를 들고 나와 길바닥에 있는 물건들을 주워 담으며 다짐했다.

'다시는 물건을 사지 말자. 이제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살자.'


다짐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제도 택배 상자가 세 개나 왔다.






75세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 재활용의 명수다. 사과 고구마 당근은 가능하면 껍질째 먹고, 상추의 노란 잎도 버리지 않고 샐러드에 넣는다. 자신이 키운 채소라 그러는지 모르지만 69세는 다 집어낸다. 작은 비닐하우스에서 수경 재배로 키운 상추, 쑥갓, 겨자 잎은 흙이 묻지 않아 씻기도 편하고 버릴 것도 없다.


75세는 나무를 좋아하고, 무언가 만드는 걸 즐긴다. 사촌 동생이 수입 업무를 하면서 나온 팔레트를 보내주었다. 일 년 동안 충분히 가지고 놀만한 양이었다. 나무 냄새를 맡으며 팔레트를 하나씩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해한 나무로 69세에게 작은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겨울 동안에는 오래된 시멘트벽을 나무 벽으로 바꿔 놓았다. 금이 가고 얼룩진 시멘트벽이 나무를 붙이자 긴 골목길처럼 깊이가 생기고 품위도 있다.







필요 없다고 버려지는 물건들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93세가 병원에서 모아 온 작은 밥 봉지들은 집에서 따뜻한 누룽지가 되고, 75세가 분해한 팔레트는 낡은 벽을 새롭게 바꿔 놓았다. 69세가 쉽게 버리는 것 속에도 새로운 용도와 가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이 집에서 쓰레기를 만드는 사람은 69세 혼자이다.





오늘도 93세는 한 손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엔 무언가를 한주먹 들고 골목길을 나선다. 길가에 놓인 노란 쓰레기 봉지 속으로 그것을 밀어 넣기 위해서이다. 93세의 매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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