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삶이 예술이다.
세탁으로 예술을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93세의 행위 예술이다. 그 공연의 관전 포인트는 디테일이다. 재미는 없지만 느끼는 게 있는 공연이다.
93세의 빨래하는 과정이 그렇다. 몇 살 때부터 빨래를 해 왔는지 모르지만 시골 동네 냇가에서 방망이로 두들기는 빨래, 양잿물, 하이타이라는 가루비누의 탄생을 보았고 이불 홑청을 다듬이질했던 시절이 있었다.
69세는 어릴 적 다듬이질하는 방망이 소리가 싫었다. 사람들이 그 시절의 낭만으로 생각하는 방망이 소리는 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듬이질하면서 이불 홑청을 되풀이해 잡아당기는 일이다. 대강하면 될 텐데 끝을 맞추어 힘 자랑하듯 서로 당기며, 이렇게 해라, 세게 하라고 야단을 맞았다.
얌전하게 접고 나면 그 위에 서서 밟아야 한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에도 어린 69세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모습이 보기 흉했는지, 저리 가라고 야단을 맞아야 그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60년쯤 지난 오늘도 같은 모습이 연출된다. 일인극이다. 이제 69세는 절대 그 공연에 나타나지 않는다.
69세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93세가 새벽에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는 이유가 있다. 아침 햇살에 빨래를 말리기 위해서다. 전에 살던 두바이는 햇빛이 좋아서 30분 정도면 빨래가 바짝 마른다. 한국은 햇빛이 강하지 않고 흐린 날도 많아 만족스러운 건조가 안 돼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편하다는 건조기를 93세는 절대 반대한다. 캐나다에 살 때 건조기에 양모 스웨터를 넣었다가 강아지 옷으로 변신한 것을 본 후 우리 집에 건조기 사용은 금지다. 하긴 69세도 놀라긴 했다. 어른 스웨터가 강아지 옷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빨래가 통돌이에서 나와 노란 나일론 보자기 위에 놓인다. 그것들을 접어 옆에 차곡차곡 놓는다. 다 접고 나면 노란 보자기로 싸서 발로 밟는다. 이 과정에서 일차 다리미질 이 된다. 높이가 있어 몸이 기울어지면 벽에 몸을 기대고 한참을 밟는다. 정해진 시간은 없다. 93세 마음이다.
밟힌 빨래 중 겉옷은 철사 옷걸이에 걸리고 작은 옷들은 빨래 건조대에 널린다. 문제는 속옷이다. 길 가는 사람이나 옆집 사람이 우리 가족의 속옷을 다 볼 수 있게 널어놓는다. 안 보이게 안쪽에 놓으라고 부탁하지만, 햇빛을 받아야 한다고 맨 첫 줄에 널려있다.
길 가는 사람이 빨래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75세의 책임도 있다. 높은 담이 답답하다고 담의 반을 잘라 내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이들이 빨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관객을 위해 화려하고 이상한 속옷을 사서 맨 앞줄에 널어놓으면 우리 집은 인기 있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이 집의 구성원을 19세, 25세, 43세로 생각할 것이다.
햇빛에 마른 바짝바짝 한 빨래가 안으로 들어온다. 검은색과 양말은 다시 93세의 손에 한참을 머물러야 한다. 세탁하면서 묻은 작은 부스러기나 보푸라기를 넓은 테이프로 떼어내는 시간이다. 눈이 어둡다면서 어찌 그리 꼼꼼하게 떼어내는지. 이제 검은색은 완벽한 검은색이 되어 예쁜 모양으로 서랍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반나절 공연이 거의 끝나간다.
토요일 세탁은 좀 다르다. 오후 퇴근을 하면 통돌이에 이미 비눗물이 차 있다. 69세는 가져온 유니폼을 통돌이에 넣는다. 69세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유튜브를 보고 저녁을 먹을 때쯤이면 유니폼은 세탁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다림질되어 얌전하게 걸려있다.
젊은 동료들은 세탁기에서 바로 꺼낸 쭈글쭈글한 유니폼을 입기도 하지만 나는 항상 다림질이 잘된 번지르르한 옷을 입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그런 줄 안다. ‘이거 내가 다려 입는 게 아니고 93세가 다려주는 거예요’라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냇가 흐르는 물에 방망이질하던 아이가 세월을 따라 삶의 어려운 무게를 견디고 93년을 살았다. 사는 동안 벽에 기대 어깨를 들썩이고, 햇빛에 앉아 굴곡진 삶을 생각하며 가슴을 펴고, 어느날은 작은 먼지를 찍어내듯 눈물을 닦아 내기도 했다.
93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음식이면 음식, 세탁이면 세탁, 청소면 청소 남다른 방법과 생각으로 삶의 질을 높였다.
93세는 혼자 말한다. '내가 공부만 했으면 니들 다 죽었어!’
다려진 옷을 번듯하게 입으면서도 69세는 다림질을 하지 말라고 한다. 아주 얄미운 자식이지만 하나밖에 없으니 귀할 수밖에 없는 딸이다. 69세 딸의 마지막 직장, 유니폼을 다리는 일이 93세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얌전하게 다려진 옷, 흰옷은 새하얗게, 검은 옷은 흠 없는 검은색으로 만든 자기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93세의 기쁨이다.
69세는 구겨진 옷이나 누런 흰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93세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