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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고를 부탁해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by 영동 나나 Feb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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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세가 냉동고 문을 열자, 비닐봉지 몇 개가 떨어져 발등을 찍는다. 


‘아! 제발, 깊숙히 넣던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다. 얼음덩어리에 맞아 본 사람은 얼마나 아픈지 안다. 화가 난 상태에서 냉동고 정리가 시작된다. 69세가 투덜대지만 93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75세는 옆에서 대강하라고 진정시킨다. 


 칸을 분리해 이름을 써 놓았지만 분류해 넣을 생각이 없다. 까만 봉지에 있는 것은 녹여봐야 알고, 돼지 양념 갈비와 LA갈비가 구별이 안가고, 어묵 봉지가 몇 개이고, 작년에 먹다 만 동그랑땡 3개가 구석에 있다. 작년에 부산에서 직접 사 온 민어는 안쪽에 화석이 되어있고, 쑥절편은 갈색 빨랫방망이로 변신했다. 외가에서 준 고추를 소분한 봉지가 5개, 이름을 알 수 없는 삶은 나물들, 작년 봄 93세가 캐온 봄나물 삶은 것, 참죽나물, 쑥 등이 똑같은 모습으로 들어가 있다. 


 작년에 들에 갖다 버린 작은 칼이 몇 개인지도 모르는 93세는, 69세가 아끼는 쌍둥이 표, WMF, 일제 글로벌 과도를 몽땅 들에다 버리고 왔다. 69세는 2025년 봄을 위해 10개에 15,000원짜리 과도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새봄을 맞아 93세는 자신의 나이를 잊고 또 들로 나갈 것이고, 새로운 나물을 위해 묵은 나물은 버려야 한다. 둑길 옆에서 몇 시간 풀을 뜯다 보면 얼굴이 까매지는 것은 물론 고개를 숙여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다. 저녁에 얼굴이 이상하다며 69세에게 보여준다. 처음에 큰 병이 생긴 줄 알았다. 들에 다녀온 줄 모르는 69세는 신장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병원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니 햇빛에 노출이 심한 것이 원인이란다. 문제는 부기가 빠지면 또 들로 나간다는 것이다. 






 93세의 냉동고 보관법은 특이하다. 냉동고를 열어보면 달력 조각이 있고 과일 포장에 쓰이는 그물망이 들어있다. 분류는 못 하지만 물기 있는 것을 보관할 때 신문이나 달력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넣거나 국 봉지는 과일 그물망에 넣어서 보관한다. 봉지 사이의 물기 때문에 서로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얼마나 스마트한 아이디어인지! 아마도 유튜브에서 보았을 것이다. 부엌 서랍장에는 과일 망이 수북히 들어있다.  





 



냉동고 문짝에는 남은 스팸 조금, 생강 두 쪽, 키위 3조각, 땅콩, 다양한 잡곡, 아이스크림, 까놓은 밤, 대추, 은행 적어도 50여 가지는 될 것이다. 아주 작은 봉지들은 언제 쓰일지 몰라 고개를 쭉 빼고 기다린다. 냉동고에서 오래 기다리다 기분 나쁘면 69세 발등으로 떨어진다. 






 69세는 냉동고의 음식을 꺼내 큰 그릇에 담아 놓고 분류를 시작한다. 멸치 큰 것 중간 것 작은 것을 하나로 합치고, 두세 개씩 남아있는 맛살도 한 봉지로 만든다. 만두는 점심 메뉴로 꺼내 놓는다. 작년에 만들었던 복숭아, 자두잼은 쓰레기통으로 가고, 병원까지 가게 했던 작년 나물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버려진다. 바닥에 눌어붙은 달력과 신문은 물을 발라 불려 놓는다. 


 얼마 후 냉동고가 훤하다, 냉동고 끝이 보이고 69세는 큰 숨을 쉰다. 쓰레기를 가지고 나와 75세와 69세는 마당 후미진 곳에 땅을 파서 쓰레기장을 만든다. 고양이가 파지 못할 만큼 깊이가 있어야 한다. 구덩이에 음식 쓰레기를 묻는다.  



‘뭐 하니?’

‘앗! 깜짝이야!’



93세가 외출한 사이 정리한 음식을 땅에 묻으려던 75세와 69세는 범죄 현장을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란다. 






 93세는 화가 나서 끓여 놓은 만둣국도 안 먹는다고 한다. 

"놔두면 다 먹을 텐데, 아까운 걸 왜 버려! “

”냉동고가 차야 든든한데, 왜 이렇게 횅하냐!"라고 섭섭해한다.

아까운 것도 모른다며 원망한다. 냉동고에 넣은 음식도 오래되면 믿을 수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버려야 한다고 큰 소리로 설명해 보지만 쉽게 풀릴 화는 아닌 것 같다. 


 93세에게 중요한 것은 냉동고에 음식이 가득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식도 쌓아 놓고 옷, 스카프, 양말도 한 서랍씩 쌓아 놓는다. 69세는 헌 옷을 버릴 때도 사는 동네에 버리지 않는다. 93세가 보면 다시 주워 올 것이기 때문이다. 93세가 가지 못하는 동네에 가서 몰래 버리고 온다. 93세는 좋은 의자는 창고로 보내고, 다리 하나 부러진 의자를 주워다가 테이프로 감아 자신의 방에 둔다. 잘못 앉으면 앞으로 꼬꾸라질 수 있는 위험한 의자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93세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현실은 오래된 음식은 버려야 하고 남이 버린 의자는 못 쓰게 되어 버린 것이니 우리도 못 쓴다. 아무리 설명해도 허전함과 아까운 생각은 없어지지 않나 보다. 


 69세는 정리한 냉동고를 보며, 이 공간이 바로 채워질 것을 안다. 냉동고가 차곡차곡 채워지듯, 93세의 허전함이 그렇게 다시 채워지고, 69세의 답답함은 부풀어 오를 것이다. 


머리는 93세의 허전함을 이해하지만, 가슴은 숨을 쉬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는 발등을 찍히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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